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1)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의 세상 (상)
어느 해인가 신라 왕은 일본 왕에게 화엄경론 65권을 책보에 싸서 선물했다. 책보는 포(布)의 겉과 안에 종이를 붙여 만들었다. 1933년 일본 정창원(正倉院)은 이 책보를 수리하기 위해 포와 종이를 분리했다. 그때 천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신라의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4개 촌의 인구, 가축, 전답, 나무 등을 조사한 행정문서인 ‘신라촌장적(新羅村帳籍)’이었다.
일본에 전해진 695년 신라 문서
4개 촌은 웅천주 관하의 3개 촌과 서원경 관하의 1개 촌이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청주시 초정리, 연기군 남면, 전의군 일대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신라촌장적은 그 내용의 풍부함이나 독특함으로 인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대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한국 고대사 연구는 이 문서의 올바른 이해를 목표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적의 연도는 간지로 을미년(乙未年)이다. 이를 두고 종래 815년이란 해석이 유력했는데, 윤선태 교수가 695년으로 바로잡았다. 윤 교수는 화엄경론이 정창원에 입고된 시기를 추적해 그 같은 결론을 얻었다. 필자도 695년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전에 소개한 삼국의 지배체제가 장적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구려와 신라는 개별 연(烟)이 다수 결합한 세대복합체 호(戶)를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기초해 취락과 촌에 공동 부담의 과표를 부여했다. 바로 그 세대복합체 호와 공동부담의 과표가 장적에 공연(孔烟)과 계연(計烟)으로 드러나 있다. 다음 회(13회:편집자주)에서 소개하겠지만 722년 신라는 정전제(丁田制)라는 토지제도를 시행했다. 이후 세대복합체의 공식 명칭은 정호(丁戶)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장적에 나타난 공연은 722년 이전 시대의 용어일 수밖에 없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신라와 당나라 전쟁 이후 기록
장적에 의하면 692∼695년 4개 촌의 인구는 486명에서 462명으로 줄었다. 역사가들은 이 같은 현상으로부터 농가의 빈곤, 이탈, 항쟁과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이라는 신라 하대(下代)의 시대상을 읽었다. 역사가들이 장적의 연도를 815년으로 추정한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렇지만 장적이 전하는 실제 상황은 그와 딴판이다. 인구 감소는 1개 촌만의 특수 현상이었다. 나머지 3개 촌에서 인구는 약간 증가했다. 그 외에 같은 시기에 새로 태어난 소가 죽은 소보다 많았다. 말도 마찬가지였다. 뽕나무도 3810그루에서 4249그루로 증가했다. 잣나무와 호두나무도 늘었다.
삼국을 통일한 뒤 신라는 한반도를 그의 판도로 차지하려는 당(唐)과의 전쟁에 들어갔다. 그 전쟁이 676년에야 끝났다. 불과 19년 전이다. 장적에 기록된 20세 이상 성인 남자와 여자의 수는 각각 99명과 143명이다. 남자가 여자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것은 그만큼 당과의 전쟁에서 남자들의 희생이 컸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19세 이하의 남자와 여자는 100명과 108명으로 그 성비가 정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필자는 장적에서 사회·경제의 혼란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안정과 번영의 길로 접어든 7세기 말 신라의 모습을 읽는다.
소와 말이 114마리
4개 촌의 공연, 곧 호의 총수는 44다. 소와 말은 총 53마리와 61마리다. 호당 1.2마리와 1.4마리다. 소와 말은 개별 호의 소유였다. 그에 비해 20세기 초 230만여 농가가 보유한 소와 말은 호당 0.3마리와 0.02마리에 불과하다. 이처럼 장적에 나타난 인간과 가축의 비율이 전하는 7세기 말의 생태 환경은 20세기 초의 그것과 판이했다. 4000그루 이상의 뽕나무는 신라 국가의 소유였다. 뽕나무를 심고, 기르고,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고, 실을 뽑고, 비단을 짜는 것은 촌민의 공동노동이었다. 마를 재배하고 마포를 짜는 것도 촌민의 공동노동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6부의 여인들은 한가위 명절 한 달 전부터 두 패로 나뉘어 마포(麻布)를 짜는 시합을 벌였다. 비단이든 마포든 공동노동으로 재배하고 직조했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민족설화다.
■기억해주세요
장적에 나타난 인간과 가축의 비율이 전하는 7세기 말의 생태 환경은 20세기 초의 그것과 판이했다. 4000그루 이상의 뽕나무는 신라 국가의 소유였다. 뽕나무를 심고, 기르고, 뽕잎을 따고, 누에를 치고, 실을 뽑고, 비단을 짜는 것은 촌민의 공동노동이었다. 마를 재배하고 마포를 짜는 것도 촌민의 공동노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