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쇼크에 "금리 내린다"…회사채 사재기
이달 공모 수요 24兆 사상최대
기관도 개인도 "회사채 사자"
[ 김진성 기자 ] ▶마켓인사이트 4월26일 오후 2시11분
‘성장률 쇼크’가 금융시장을 덮치면서 채권시장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경기침체에 따른 금리 하락(채권값 상승)에 베팅하는 뭉칫돈이 회사채시장으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은 물론 개인투자자까지 ‘회사채 사재기’에 나서는 움직임이다.
한국경제신문 자본시장 전문매체인 마켓인사이트가 26일 공모 회사채 수요 현황을 집계한 결과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4월 들어서만 총 23조7270억원의 ‘사자’ 주문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4월 수요예측(사전청약) 제도 도입 이후 기관 수요가 월간 기준 20조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체 모집금액이 4조7650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다섯 배에 가까운 돈이 몰린 셈이다. 월별 역대 최고 청약 경쟁률(4.98 대 1)이다. 우량등급인 KB증권 회사채(AA)에는 3000억원 모집에 일곱 배에 가까운 2조300억원이 유입됐다. BBB급 비우량채권도 발행되자마자 ‘완판’ 행진이다.
강한 매수세에 힘입어 기업도 경쟁적으로 회사채 발행에 나서고 있다. 이달 들어 36개 기업이 총 6조8620억원어치 회사채를 발행했다. 종전 사상 최대치인 지난 1월 기록(6조3280억원)을 깼다.
채권 유통시장에서도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올 들어 이달 24일까지 장외시장 회사채(은행채·ABS 포함) 순매수 규모는 44조8155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9% 증가했다. 개인투자자도 순매수(1조2429억원) 규모를 5.6% 늘렸다. 개인은 증권사 소매판매부서를 통해 공격적으로 고금리 회사채를 사들이고 있다.
경기침체 공포가 금리를 강하게 짓누를 것이란 전망이 회사채 매수세에 불을 붙였다는 분석이다. 올 1분기 경제성장률은 -0.3%(전 분기 대비)로 추락했다. 고용·소비·수출·투자 등 주요 경기지표가 일제히 악화되자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는 게 시장 평가다. 이를 반영해 3년만기 국고채 금리가 기준금리(연 1.75%) 밑으로 떨어지는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금리가 하락하면 채권값은 상승한다.
지난 22일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300억원 규모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 수요예측(사전 청약)을 했다. 신용등급은 다소 낮은 편(BBB+)이었지만 최고 연 4.9% 금리를 주겠다고 약속하자 매수 주문이 쏟아졌다. 전체 주문 규모는 1670억원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개인 투자자들이 증권사 소매 창구를 통해 낸 주문이 970억원에 달했다.
경기 비관론 속 활황
올 1~4월 회사채 시장에는 65조8680억원이 유입됐다. 작년 이맘때도 회사채 시장은 호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올해 유입된 금액은 전년 동기와 비교해서도 57.5% 늘었다. 대한항공(BBB+) 한화건설(BBB+) 두산인프라코어(BBB) 등 비우량등급으로 낙인 찍혀 투자자에게 외면받던 기업들이 올 들어선 ‘흥행’ 속에 모조리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신기록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 1월 대림코퍼레이션 회사채가 사상 최고 청약경쟁률(16.4 대 1)을 기록한 데 이어 2월엔 LG화학이 사상 최대인 2조6400억원의 투자 수요를 확보했다. 이 회사를 포함해 올해 회사채 수요예측에 1조원 이상의 매수주문을 받은 곳은 19개사다. 작년 한 해 기록(17개사)보다 많다.
회사채 시장이 달아오른 배경엔 경기 비관론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 하강이 가속화하면서 금리 하락세(채권값 상승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데 투자자들이 베팅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하반기 경기지표가 악화하면서 국내 채권 금리는 내리막을 타고 있다. 지난해 5월 중순만 해도 연 2.31% 수준이던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연말엔 연 1.78%로 떨어졌다. 올 들어 한국 경제를 이끌던 수출마저 감소세를 나타내면서 경기 비관론이 한층 짙어지자 바닥에 도달했다고 평가받던 단기 금리가 추가 하락했다. 지난달 말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1.679%까지 추락하며 기준금리(연 1.75%) 밑으로 주저앉았다.
한국 경제 1분기 성장률이 역성장한 가운데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할 여지가 커졌다는 관측이다. 금리가 하락할수록 이와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 가격은 상승한다. 한 증권사 채권 담당자는 “만기까지 보유하면 국고채보다 높은 금리를 받을 뿐 아니라 중간에 팔아 쏠쏠한 매매차익까지 거둘 수 있다는 게 회사채의 매력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고채 금리, 기준금리 역전
지난달 말부터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기준금리를 밑도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3월 27일부터 지난 12일까지 13거래일 연속 이 같은 금리 역전 현상이 지속됐다. 이후 역전 현상은 해소됐지만, 1분기 경제 역성장 소식이 전해지자 26일 연 1.72%로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이 같은 금리 역전이 5거래일 이상 이어진 뒤엔 예외 없이 수개월 내 기준금리 인하 결정이 뒤따랐다.
오해영 신한금융투자 FICC본부장은 “당분간 장기금리 위주로 금리가 내리막을 타겠지만 단기금리가 추가 하락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했다. 그는 “올해 한국은행이 제시한 연 2.5%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면 사실상 금리 인하 신호로 보고 투자자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채권 매수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시에 울리는 무더기 신용강등 ‘경고음’
하지만 올해 기업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될 것이란 경고가 나오면서 회사채 시장 열기가 한순간에 꺾일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S&P는 지난해 10월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그룹 주요 계열사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떨어뜨렸다. 올 들어선 LG화학, SK이노베이션, SK종합화학, SK텔레콤, SK브로드밴드, SK E&S 등 6개 기업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2014년(연말 기준) 10개 기업에 부정적 꼬리표를 붙인 후 5년 만에 가장 많은 숫자다. 등급 전망이 부정적인 기업은 조만간 신용등급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무디스도 현대차그룹 계열사를 비롯해 SK텔레콤, SK E&S, 매그나칩반도체 등의 신용등급에 부정적 전망을 달았다. 이마트와 KCC는 신용등급 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다. 유통·자동차·정유·화학·통신 등 국내 핵심 산업 선두주자들이 잇달아 신용도가 악화될 위기에 내몰렸다. 신용위험 확대가 신용등급 강등으로 현실화하면 타오르던 회사채 시장은 일시에 찬물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