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수산물 분쟁' 1심 판결 뒤집고 이겼는데
中 '사드 보복' 제소 여지조차 없앤 까닭은?
중국의 기술굴기 도전에 맞설 전략 세워야
최병일 < 이화여대 교수·한국국제경제학회장 >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은 함박웃음으로 넘쳐났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환한 미소로 개선장군을 맞았다.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 판정이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 합치된다는 판정을 이끌어낸 통상전사들이었다.
그것은 한 편의 대역전 드라마였다. 한국은 1심에서 패소했다. 최종심인 상소심에서도 패소가 예견된 터였다. 한국 정부는 패소를 기정사실화하고 보도자료까지 준비해 뒀다. 그러나 지난 1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날아온 상소심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통쾌한 역전승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일본이었다.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 우승을 다퉜던 한·일 야구 경기가 떠올랐다. 예선전에서 한국은 시속 160㎞의 마구를 뿌리는 괴물투수 오타니 쇼헤이의 위세에 압도당했다. 공격 한 번 못해보고 0-5로 참패한 한국은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본과 다시 만났다. 오타니는 여전히 난공불락이었지만 한국 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8회까지 0-3으로 지고 있었는데 9회에 기적같이 기회를 살리며 단숨에 4점을 내 경기를 뒤집었다. 세계 야구사에 길이 남을 역사가 쓰인 순간이었다.
후쿠시마 수산물 판정은 WTO 분쟁사에 새장을 열었다. 2011년 대지진과 쓰나미 여파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 한국 등 50여 개국은 후쿠시마산 수산물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발동했다. 일본은 한국만 콕 집어 WTO 분쟁기구에 제소했다.
WTO에 제소된 식품·위생 관련 분쟁 40여 건에서 피소국이 승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WTO는 ‘국내적’인 식품위생 조치가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을 저해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위장된 무역장벽’이 아닌지를 검증하는 국제기구라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제3국 패널위원과 상소위원들 앞에서 위장된 무역장벽이 아닌 정당한 조치임을 입증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일본은 “후쿠시마 수산물의 방사성 물질(세슘) 수치가 위해 기준치를 넘지 않는다. 다른 국가 수산물과 비교해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없다. 한국 측의 수산물 금지 조치는 과도하다”는 논리를 폈다. 한국은 “원전사고로 인한 후쿠시마 수산물의 잠재적 위험성을 검역 과정에서 걸러내는 것은 정당한 검역주권 행사”라고 반박했다. 지난해 2월, 1심 패널은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은 상소심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로부터 14개월이 흐른 지난 12일, 상소심이자 최종심은 1심 판정을 뒤집고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추상적인 검역주권에 의지하는 방어전략을 바꿔 일본의 인접국이란 지리적 근접성, 원전 사고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전략이 주효했다.
후쿠시마 수산물 역전 드라마는 분명 통쾌하지만, 한·일전의 승리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 무역상대국의 불공정한 무역행태를 WTO에 제소해 국제무대에서 그런 행태를 공론화하고 그 행태의 정당성에 대한 판정을 구하는 것은 WTO가 모든 회원국에 제공하는 권리다. 이 때문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는 왜 WTO 분쟁 절차를 활용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청와대는 중국을 제소하자는 담당부처 전문가들의 의견을 서둘러 진화했다. 중국을 WTO에 제소하지 않겠다는 정부 방침을 공개적으로 발표까지 했다. 제소 가능성을 남겨두는 전략적 고려조차 없었다. 무역보복에 중국 정부가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워 승소 가능성이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번 후쿠시마 수산물 판정 대역전 드라마를 이끌어낼 정도의 실력을 가진 팀이라면 중국의 오리발을 찾아내고도 남았을 듯하다. 무엇이 두려워 분쟁 시비를 가릴 생각을 단념했는지 궁금하다. 중국을 제소하지 않은 대신 받아낸 것이 무엇인지도 아리송하다.
한국 무역의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관계는 전향적, 전략적으로 재점검해야 하는 전환기에 서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합의로 이어지더라도 세계 통상질서는 무역전쟁 이전으로 복원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부가가치가 낮은 최종 조립지가 아닌 기술대국으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중국의 기술굴기는 한국에 직격탄이다. 후쿠시마 수산물 역전 드라마의 통쾌함을 넘어 중국의 변화를 내다보고, 한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