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개별공동체가 못하는 공공기능 수행하죠…삼국은 흉년때는 비축한 곡식 풀어 백성 구제했어요

입력 2019-04-22 09:01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10) 삼국의 경제와 사회 (하)


국가는 지배세력의 수탈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다. 국가는 개별 공동체로서는 불가능한 공공 기능을 수행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창출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국가는 산적 떼와 다를 바 없으며 결코 영속할 수 없다. 삼국은 논밭을 개간하고, 방조제를 쌓고, 저수지를 파고, 철제 농구를 보급하고, 곡식을 비축해 흉년에 대비했다.

벽골제는 방조제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 후 33년 백제의 다루왕(多婁王)은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게 했다. 그대로 믿기는 곤란한 이른 시기에 관한 기록이지만,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공공 기능으로서 권농(勸農)을 중시한 삼국인의 관념을 대변하고 있다.

331년 김제에 벽골제가 세워졌다. 《삼국사기》는 신라 흘해왕(訖解王)이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당시 김제 일원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필자는 마한 55국의 하나인 벽비리국이 아닐까 짐작한다. 김제 일원은 표고가 해수면과 거의 동일한, 한반도에서 가장 낮은 연안 평탄지이다. 벽골제가 큰 저수지라는 통념은 후대에 잘못 형성된 것이다. 벽골제는 바닷물의 침입을 막는 방조제로 세워졌다. 502년 신라의 지증왕(智證王)은 처음으로 쟁기갈이를 보급했다. 531년 신라의 법흥왕(法興王)은 전국적으로 제방을 수리하라는 영을 내렸다. 536년에는 경북 영천에 청천제라는 저수지를 축조한 다음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따르면 축조에 동원된 사람이 7000명에 달했다.

고구려는 진대법 실시

삼국은 큰 흉년이 들면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했다. 194년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사냥을 가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흉년에 품을 팔 데가 없어 노모를 봉양할 길이 없다는 사연이었다. 이에 매년 3~7월 관청의 곡식을 농민에게 나눠 준 다음 10월에 거둬들이는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삼국이 행한 진휼은 대개 임시방편에 그쳤으며, 그 범위도 지배세력이 모여 사는 왕도와 그 주변에 한정됐다. 628년 신라에 큰 가뭄이 들어 그해 겨울에 심한 기근이 발생했다. 당시 관리들이 궁중의 창고에서 곡식을 훔쳐 나눠 먹었다. 이때 검군(劍君)이란 관리가 홀로 훔친 곡식을 나눠 받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다른 관리의 미움을 사서 살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신라의 왕도에서조차 진휼이 제도화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초창기 한국사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최초의 국가는 노예제 사회라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따라 삼국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남아 있다.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왕실과 귀족 가문에 가내 노예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다. 종족 간, 부족 간, 국가 간 충돌이 잦아지면서 포로 노예가 발생한 추세도 부정하기 힘들다.

노예제 사회설은 무리

그렇지만 노예가 생산노동의 지배적 형태였음을 알리는 기록이나 증거는 단 한 조각도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 ‘노(奴)’라는 한자를 검색하면 통일 이전 시대에는 총 61회 나온다. 그중 절반 이상이 귀족의 이름과 성(城)의 지명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노를 둘러싼 비천 관념은 아직 성립하지 않은 시대였다. 여기까지 설명한 대로 삼국시대의 사회 구성은 연→세대복합체→취락→읍락→국→국가의 누층적 위계로 편성됐다.

노(奴)는 각 위계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정치적·군사적으로 신종(臣從)하는 관계를 대변했다. ‘노예제 사회’설은 그리스 신화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키가 자신의 침대보다 길면 잘라 죽이고, 짧으면 늘려 죽였다는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시킨다.

■기억해주세요

삼국은 큰 흉년이 들면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기민을 구제했다. 삼국이 행한 진휼은 대개 임시방편에 그쳤으며, 그 범위도 지배세력이 모여 사는 왕도와 그 주변에 한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