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자네, 미국 가면 박사 말고 다른 걸 해오게. 국가가 어떻게 과학 영재를 기르고, 연구소는 어떻게 움직이며, 산업계는 어떤 연구로 1등 국가를 일궜는지 보고 와서 학교와 연구소 만드는 일로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가 돼 주게나.”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이 1959년 유학을 준비 중이던 정근모 인턴 연구원에게 한 말이다. 김 원장은 프랑스 유학파로 장관을 지냈고, 정근모 당시 인턴은 유학 후 KAIST를 설립하고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한 원자력 분야 석학이다. 둘 다 한국 과학기술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과학기술계는 불모지에 가까웠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약 200명의 국비 유학생이 파견되고, 이들에 의해 과학기술의 토대가 마련됐다. 1967년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발족 이후 연구 성과가 하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광복 무렵 10명 미만이던 과학자 수도 크게 늘었다.
정부와 민간의 연구개발비는 지난해 총 78조원으로 세계 5위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4.55%로 2017년 기준 세계 1위다. 그런데도 질적 성과와 가치 창출은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관료주도형 통제와 각종 법망, 투자의 비효율성에 발목을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제 열린 ‘위기의 과학기술혁신정책’ 세미나에서도 이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임기철 전 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과학기술 정책의 경직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탈(脫)원전 정책’을 꼽으며 “강력한 기술 성장 동력이었던 원전산업을 정부가 스스로 붕괴시켰다”고 지적했다. 이 여파는 방사선 의학 같은 응용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신입생 중 20%가 자퇴했다. KAIST의 원자력 전공 지망자는 거의 전멸 상태다. 최근 원자력 연구 60주년 기념행사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이 불참했다. 내일 ‘과학의 날’을 앞두고 전국공공연구노조는 “과학기술 정책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글로벌 과학계는 올해 굵직한 기념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케플러 행성운동 제3법칙 발표 400주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증명 100주년, 인류 달 착륙 50주년…. 세계 과학계는 뛰는데 우리만 뒷걸음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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