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산안법 포비아'
정부, 시행령 22일 입법예고
재해 발생 때 작업중지 명령 기준
구체화 해달라는 의견 반영 안돼
[ 도병욱 기자 ]
정부가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오는 22일 입법예고한다. 중대재해 발생 때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는 기준을 구체화해달라는 기업들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업 중지 해제를 위한 조건을 완화해달라는 하소연도 묵살됐다. 산업계에서는 “툭하면 공장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화학물질을 많이 쓰는 반도체업계와 화학업계는 초비상이다. 개정된 산안법은 내년부터 시행된다.
작업 중지 명령 남발 가능성
19일 재계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최근 경영계와 노동계에 산안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공개했다. 고용부의 최종안은 한 달 전 작성된 초안에서 거의 바뀌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영계 관계자는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달 말 개정안에 대한 경영계 의견서를 냈지만 반영된 건 사실상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산안법은 사업장 내 사고를 줄이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지난해 말 기존 법보다 안전 관련 규제를 대폭 강화한 전부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유해·위험 작업의 도급을 금지하는 조항과 고용부 장관에게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대한 작업 중지 명령권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추가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가 논의를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본회의를 통과해 ‘졸속 처리’ 논란이 일었다.
고용부는 올해 초부터 산안법 시행령과 규칙을 개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기업들은 시행령이나 규칙에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는 구체적인 기준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개정 산안법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 등 모호한 기준만 있어 작업 중지 명령이 남발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자의적 판단이나 여론에 밀려 작업 중지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쏟아졌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작업 중지와 관련한 구체적인 기준을 세우지 않았다. 업종이나 기업별로 사정이 다른 만큼 세세한 기준을 시행령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게 정부 논리다.
한 대기업 안전담당 임원은 “구체적인 기준이 없으면 사업장 내 중대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공장을 멈춰야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사고 원인이 사업주에게 있지 않고 해당 직원의 부주의나 실수 등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더라도 공장 가동 중단에 따른 피해는 보상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4시간 돌아가는 반도체 생산라인은 하루만 멈춰도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된다.
공장은 쉽게 멈추게 할 수 있지만 작업 중지 명령을 해제하는 조건은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게 경영계의 지적이다. ‘기업이 작업 중지 해제를 요청하면 4일 내 심의위원회를 연다’는 조항이 대표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사고 원인을 파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했더라도 4일을 기다리라는 것은 기업에 지나친 부담”이라고 비판했다. 경총은 이 기간을 하루로 줄여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의위원회 구성이 어려울 경우 4일 내 회의를 열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경제단체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작업 중지 해제를 신중하게 결정하자는 노동계 요구를 적극 받아들였다”며 “작업 중지 해제에 며칠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산업 현장이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작업 중지 해제를 요청하려면 중대재해와 관련된 작업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조항도 논란이다. 의견 청취 절차 자체가 노사 갈등을 불러올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점에서다. 경영계의 강한 반발에도 정부는 이 조항을 시행규칙 최종안에 포함했다.
“기업 의견 수용 절차 생략”
원청 사업주에게 사업장 안팎의 산업재해 대부분을 책임지게 하는 조항에 대한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기존 산안법을 기준으로 하면 원청 사업주는 사업장 내 위험 작업이 이뤄지는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산업재해만 책임지면 됐다. 하지만 개정 산안법은 원청 사업주가 책임져야 할 범위를 사업장 전체와 사업장 외부의 위험 작업이 이뤄지는 장소로 대폭 확대했다. 경제계 관계자는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되지 않으면 전국 각지의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산업재해를 원청 사업주가 모두 관리하고 책임져야 할 판”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원청 사업주가 사업장 밖에서 이뤄지는 작업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도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기업들은 또 간헐적으로 사업장에 들어오는 사외 협력업체 직원들의 안전관리를 원청 사업주가 하는 건 무리라고 호소했지만, 정부는 이와 관련한 예외 조항을 시행령 및 시행규칙에 넣지 않았다.
기업들이 연구개발(R&D)에 쓰는 화학물질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요건이 까다롭다는 비판도 거세다. 지난해 국무조정실 규제개혁위원회가 “연구개발용 화학물질 내용을 공개하는 건 영업기밀 유출로 이어질 수 있어 대체방안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고용부는 기업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고용부가 산안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만들면서 기업과 소통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경총이 지난달 말 경영계 의견서를 고용부에 제출한 이후 양측이 만난 건 단 한 차례뿐이었다. 그나마 딱 한 번 열린 회의도 2시간여 만에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회의 참석자는 “경영계 의견을 듣고 토론하기보다는 고용부가 일방적으로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설명하는 자리였다”고 했다. 산안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은 국무조정실 규제개혁위원회 심의와 법제처 심사, 차관회의 및 국무회의를 거쳐 공표된다.
■산업안전보건법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1981년 제정된 법안. 산업재해 예방과 안전대책 마련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지난해 말 원청 사업주의 책임을 대폭 강화하는 취지의 전부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