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털의 진화…남편 빼고 다 빌려쓴다

입력 2019-04-19 14:17
수정 2019-04-20 06:37
커버스토리
황금알 낳는 렌털시장

대기업·스타트업까지 가세
연 40兆 시장으로 급성장


[ 김정은 기자 ]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웅진그룹 창고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정수기가 쌓여갔다. 윤석금 회장은 ‘이러다 회사가 부도나는 것 아닌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차라리 빌려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코디’로 불리는 주부사원을 고용해 30분의 1 가격에 정수기를 대여해 줬다. 국내 렌털(대여)산업의 첫걸음이다. 유통의 패러다임이 ‘소유’에서 ‘대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렌털산업이 소비시장의 대세로 자리잡았다. 초고가 제품과 정수기 등 일부 생활가전에서 출발한 시장은 렌털 제한 품목을 손으로 꼽을 만큼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생활가전 분야 렌털 누적 계정은 1260만 개를 넘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지난해 31조9000억원이던 국내 렌털시장은 2020년께 40조1000억원 규모로 팽창할 것으로 전망했다.

렌털시장의 위상도 달라졌다. 렌털은 중소기업과 후발업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위축된 소비심리를 자극해 산업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 마케팅 기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렌털시장에 대기업과 사업영역을 파괴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이유다.

정수기와 비데에 이어 최근 미세먼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함께 공기청정기가 렌털시장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소모품 교체와 관리비 등 합산비용이 일시불로 구입하는 것보다 싸다는 점이 렌털을 선호하는 이유다. 경기 불황과 1인 가구 증가, 공유경제 확산은 렌털 품목의 무한 확장과 성장을 유인하고 있다.

윤 회장은 “렌털은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유통사업이자 라이프스타일”이라며 “앞으로 남편 빼고 웬만한 것은 다 빌려 쓰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일상은 이제 렌털로 시작해 렌털로 마무리된다.’ 얼마 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이야기다. 렌털사업이 시작된 지 올해로 21년. 빠른 성장세 못지않게 성장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분야로 꼽힌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렌털시장은 2016년 25조9000억원에서 2020년에는 40조1000억원을 기록해 4년간 연평균 11.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안마의자, 매트리스 등 가정용품 렌털시장은 같은 기간 5조5000억원에서 10조7000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렌털 매트리스서 잠깨서, 렌터카 타고 회사 출근…
'2019 호모 렌털루스'의 삶

눈떠서 잠들 때까지

월요일 아침, 서울 마포구에서 혼자 사는 40대 직장인 김모씨는 렌털한 웅진코웨이 탑퍼 교체 싱글 매트리스에서 눈을 떴다. 집먼지진드기로 알레르기비염을 앓고 있는 김씨는 얼마 전부터 매트리스 관리 서비스를 받고 있다. 위생관리 전문가인 ‘홈케어닥터’가 주기적으로 방문해 전문 장비로 매트리스 오염도를 측정하고 UV살균 등을 해준다.

김씨는 렌털한 웅진코웨이 시루직수 정수기에서 정수물 한 컵을 받아서 천천히 마신다. 신진대사가 활발해지며 잠이 깨는 느낌이 든다. 거실에 있는 웅진코웨이의 멀티액션 공기청정기엔 파란색 불이 들어와 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하지 않구나.’ 욕실에 들어가 렌털한 청호나이스 비데에 앉은 뒤 렌털한 청호나이스 연수기로 세수와 샤워를 한다. 출근 준비의 마지막은 주방 구석에 마련한 ‘홈카페’에서 라테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는 것이다. 현대렌탈케어에서 렌털한 커피머신 큐밍스타에서 내린 독일제 달마이어 원두의 향이 집에 은은하게 퍼진다.

출퇴근은 지하철을 탈 때도 있지만 외근이 있는 날은 장기 렌트한 중형차를 이용한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뒤 퇴근한 김씨는 음식 냄새가 배고 미세먼지로 오염된 정장 재킷을 현대렌탈케어에서 렌털한 삼성전자 에어드레서에 넣는다. 의류청정기를 렌털한 뒤부터 세탁소에 갈 일이 거의 없어졌다.

라이프스타일까지 바꿔놓은 렌털

주말에 장 본 식재료를 꺼내놓고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렌털한 쿠쿠홈시스의 하이브리드 전기레인지를 켜서 된장국을 끓인다. 오늘의 메뉴 콘셉트는 건강식. 렌털한 교원 웰스 식물재배기에 샐러드와 허브 등 쌈채소가 제법 자랐다. 부모님 댁에도 식물재배기를 렌털해 드렸는데 ‘1주일만 키우면 신선한 채소를 따 먹을 수 있다’며 만족해하는 것 같다. 직원이 주기적으로 방문해 배양액 교체 등 관리를 해 준다.

빨래는 제법 오래 걸리니 식사 준비를 하면서 틈틈이 세탁을 시작한다. 렌털한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빨래가 다 되면 렌털한 의류건조기에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예전에는 아파트 베란다에 빨래를 널었으나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서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어 건조기를 렌털했다. TV를 보면서 식사한 뒤 잔뜩 쌓인 설거지 거리를 렌털한 SK매직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설거지 끝나는 시간과 건조기가 완료되는 시간이 비슷할 것 같다.

오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뒷목과 어깨가 꽤 뻐근하다. 바디프랜드에서 렌털한 안마의자 팬텀Π에 앉아 상반신 집중 마사지 기능을 실행해 안마를 받았다. 몸이 노곤해지니 반신욕이 하고 싶어졌다. 청호나이스 원적외선 반신욕기에 들어가 땀을 흠뻑 내니 개운해진다. 피부가 푸석푸석한 것 같아 ‘홈케어’를 한 뒤 잠들어야겠다. 렌털한 매트리스에 누워서 렌털한 셀리턴 LED(발광다이오드) 마스크를 얼굴에 덮는다. 이렇게 하루가 간다.

김씨의 일상은 렌털한 제품으로 시작해 렌털 제품으로 마무리된다. 사실 그가 사는 역세권의 소형 아파트도 전세다. 살림살이 역시 렌털한 갖가지 제품들로 채웠다. 렌털한 회사의 전문 직원이 주기적으로 방문해 부품을 교체하고 관리해 주는 서비스가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렌털해서 사용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젠 목돈을 내고 구입해 오래 쓰는 일이 부담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생활가전 렌털료로 100만원 이상 내고 있지만 그만큼의 가치를 하는 것 같다. 약정 기간이 지나면 기존 제품들을 신제품으로 싹 바꿔서 써 보고 싶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