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 경제부 기자 argos@hankyung.com
[ 백승현 기자 ]
고용노동부는 지난 17일 최근 노동계가 요구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선(先)비준’ 주장에 대해 “국회 동의 없이는 선비준할 수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용부 국제협력관이 언론 브리핑을 자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헌법 원칙에 어긋나는 선비준 요구가 노동계를 중심으로 잇따르자 정부 입장을 명확히 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란 확산을 막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예상대로 노동계는 즉각 반발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고용부 브리핑 직후 “하나 마나 한 소리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도, 의지도, 영혼도 없는 고장난 녹음기 같은 입장”이라고 비난했다. 또 “정부가 지금까지 ILO 핵심협약 비준안조차 마련하지 않았다는 게 오늘 발표로 확인됐다. 명백한 직무유기이자 시민과 국제사회에 대한 기만”이라고도 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격한 반응이었다.
그로부터 약 5시간 뒤 민주노총은 ‘ILO 긴급공동행동’ 명의로 또 하나의 성명을 냈다. 역시 고용부 발표에 대한 성명이었다. 2차 성명의 내용은 이렇다. “고용부는 오늘 국회 비준 동의를 거쳐 ILO 핵심협약을 선비준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협약과 충돌하는 국내법을 먼저 개정해야 한다는 ‘선입법’만이 아니라 국회 동의권을 전제로 정부가 ‘선비준’하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밝힌 것이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주장해온 것과 같다. 정부는 즉각 비준 동의안을 마련해 국회에 송부할 것을 촉구한다.”
민주노총의 성명대로라면 이날 고용부 발표는 ‘영혼 없는 고장난 녹음기’에서 5시간여 만에 ‘노동계와 뜻을 같이하는 선언’으로 돌변한 것이다. 정부 비판보다 비준 촉구가 낫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야말로 아전인수가 따로 없다.
지난 8개월여간 이어진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한 사회적 대화가 끝내 무산된 것은 노동계가 자신들의 요구는 관철시키면서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과 같은 경영계 요구에 대해선 ‘노동기본권 침해’라며 하나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ILO 협약 비준을 위해서라도 정부를 어르거나 겁박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대화 테이블에 들어와 앉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