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김정은 '비핵화 장기전'…벽에 부딪힌 '문 대통령의 속도전'

입력 2019-04-16 17:38
박동휘 기자의 한반도는 지금

'종신 권력' 김정은 "어차피 장기전"
트럼프도 "빨리 갈 필요 없다"
'5년 단임' 문 대통령의 평화구상 '흔들'


[ 박동휘 기자 ] 지난해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났을 때, 눈 밝은 이들은 역사적인 이벤트를 성사시킨 ‘문(文)의 속도’에 주목했다. 2017년 5월 당선 이후 약 1년 만에 이뤄낸 일이라는 점에서다. 시간에 쫓겨 실기(失機)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문 대통령은 누구보다 5년 단임제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공표된 김정은의 시정연설은 속도를 중시하는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을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국무위원장으로 재추대되며 ‘종신 권력’을 손에 쥔 김정은은 그의 협상 파트너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간 싸움’에 돌입할 것임을 선언했다. “미국과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전”이라고 했고, ‘빅딜’을 요구하는 미국을 향해 “그런 식의 계산법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김정은과의 ‘인내심 게임’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뮐러 특검’ 공포에서 벗어나는 등 재선(2020년 11월)에 청신호가 켜지면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재선을 가정한다면 트럼프 대통령 임기는 아직 6년이 남아 있다.

3차 미·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생각하는 시간표가 상당히 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김정은이 제시한 ‘올해 말까지’를 능가할 것이란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김정은과의 3차 정상회담에 대해 “빨리 가고 싶지 않다. 빨리 갈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속도가 왜 이리 느리냐는 질문엔 “지난 40년을 생각해보라”고 반문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같은 날 비슷한 발언을 했다. 그는 “제재를 해제한다는 건 북한이 더 이상 핵무기 프로그램이나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뜻한다”고 잘라 말했다.

16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3국 순방을 떠난 문 대통령 머릿속은 온통 한반도 평화의 진전을 위한 방안으로 채워져 있을 게 자명하다. 문 대통령은 전날 수석·보좌관회의에서 4차 남북한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남·북·미 3자 정상회담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는 김정은의 직격탄엔 직접 대응하지 않는 ‘인내’를 보였다. 어쩌면 이번 기회는 ‘문(文)의 속도’대로 북핵 제거를 실현하기 위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지난 11일 워싱턴DC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문 대통령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중재안’을 갖고 왔을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진행되고 있는 많은 건설적 일들이 있다”고 했다. 정상 간 ‘톱다운’뿐만 아니라 실무진의 ‘보텀업’ 협상이 이미 시작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 결과는 김정은의 다음 행보에서 증명될 것이다.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