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R까기] 청약시장 꼬여버린 숫자, 혜택은 누가 챙기나

입력 2019-04-14 08:57
수정 2019-04-14 09:04
높은 청약경쟁률에도 낮은 계약률
실제 청약자보다 무순위 '사전' 청약자 훨씬 많아
"온라인 줄서기, 전국 단위 현금 부자들의 잔치될 우려"



"그 정도면 줄 선거 아니예요", "물티슈나 부채 정도로 가지 않아요", "모델하우스에 안 가고 청약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예요"….

불과 3년여 전에 흔했던 세종시의 풍경이다. 당시 세종시에서는 수년 째 새 집과 새 상가들이 공급되고 있었다. 모델하우스가 몰려 있는 지역에는 항상 10여개의 모델하우스가 문을 열고 있었다. 보통 모델하우스 풍경하면 '줄 세우기'와 '사은품'으로 대변됐지만, 세종시는 달랐다.

그렇다고 청약경쟁률이 낮았던 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국 공무원들이 청약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방문객수와 청약자수의 괴리에서 이득을 챙긴 건 특별공급으로 집을 받아갔던 공문원들이었다. 직접 모델하우스에 찾는 손님들에게는 후한 사은품들이 손에 들렸다. 방문한 현장 뿐만 아니라 주변 단지들이나 상가에서도 마케팅용으로 안내문과 선물들을 뿌렸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현장을 찾는 주민들은 어지간한 사은품에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현지 주민 보다 공인중개사들의 발걸음이 더 잦았던 곳이 세종시 모델하우스 풍경이었다.

◆전국 청약됐던 세종시, 거품 청약률 '과열' 신호

세종시에 긴 줄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건 2016년 하반기 부터였다. 콧대높은 세종시 대신 전국구에서 몰려든 수요자들과 투자자들이었다. 2016년 7월, 세종시 거주자 우선 분양이 축소되고 전국 청약이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다. 모델하우스 주변은 시장을 방불케하는 장이 펼쳐졌다. 더 놀라운 점은 현장을 방문한 사람들 보다 청약에 몰려든 인파였다. 세종시에서 전국에서 청약을 받는 기타지역의 경쟁률을 수백대 1을 넘나 들었다. '방문객수'도 많았지만, 이를 훨씬 뛰어넘는 '청약 신청자수'가 나왔다. 숫자가 맞지 않았던 세종시는 이렇게 '묻지마 청약'의 장이 됐고,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됐다.

분양 시장 흥행과 성공을 대표하는 숫자는 '주말 집객수', '청약 경쟁률', '계약률' 등이다. 모든 숫자가 골고루 높으면 수요·공급자 모두 만족하는 현장이 되곤 한다. 하지만 숫자가 과도하게 치솟거나 두 숫자가 엇나가면 청약제도나 시장이 꼬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최근에도 이렇게 꼬여버린 숫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청약 경쟁률 숫자는 높은데 계약률이 낮거나, 집객은 많지 않은데 청약경쟁률은 높거나, 청약경쟁률은 미달인데 계약은 빨리 마무리되는 경우 등이다. 이 같은 현상은 규제가 심한 투기과열지구나 조정대상지역 등이 속한 서울·수도권에서 나타나고 있다.

청약 경쟁률 숫자는 높은데 계약률이 낮은 경우는 서울에서 속속 나왔다. 효성중공업이 서대문구에서 분양한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는 419가구를 일반분양한 결과 41%인 174가구가 미계약됐다. 이 아파트는 앞서 2월 실시한 1순위 청약에서 평균 11.1대 1의 경쟁률로 전 주택형이 마감됐다. 노원구에서 12대 1의 평균 경쟁률로 분양됐던 '태릉 해링턴 플레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일반분양 물량(560가구)의 11%인 62가구가 미계약 물량이 됐다. 이들 단지는 금융결제원 아파트투유가 추가 공고를 내고 미계약분에 대한 청약을 받는다.

◆무순위 사전 청약, 낮은 문턱에 수천명 몰려

반면 청약경쟁률에 몰린 통장수보다 훨씬 많은 예비청약자들이 대기하는 곳들이 있다. 지난 2월 도입된 무순위 청약이 적용된 단지들이다. 무순위 청약은 미계약분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우선적으로 부여되는 제도다. 무순위 청약은 청약통장이 없어도 만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고, 청약 가점도 상관이 없다. 무순위 청약 후에도 1순위 청약에 참여할 수 있다. 이른바 모델하우스 앞에서 '밤샘 줄서기'나 '추첨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됐다.

무순위 청약은 '사전'과 '사후'로 나뉜다. '사후'는 앞의 경우처럼 미계약분에 대해 추가 공고를 내고 받게 된다. '사전'은 1순위 전에 미리 받게 된다. 최근 미계약분이 예상보다 많이 나오면서 분양 현장에서는 '사후' 보다는 '사전'을 선호하고 있다. '남는 집을 선택한다'는 것보다는 '인기 단지를 미리 점찍어 둔다'는 분위기도 한 몫했다. 알고보면 조삼모사(朝三暮四)나 다름 없는데도 말이다.

당초 분양 현장에서는 '청약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얼마정도 더 인원이 있겠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순위 '사전' 청약에 대한 열기는 예상보다 뜨거웠다. ㈜한양이 경기 구리시 수택동에서 재건축하는 '한양수자인 구리역'이 이러한 경우다. 1순위 청약에서 94가구(특별공급 제외) 모집에 990명이 청약을 접수해 평균 10.53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앞서 받은 '무순위 사전 청약'에서 4015명이 몰렸다. 무순위 청약이 1순위 청약보다 무려 4배 이상 청약자들이 쏠렸다.

서울 첫 사전 무순위 청약접수 단지로 관심을 모았던 ‘청량리역 한양수자인 192'에는 무순위 이 단지의 사전 무순위 청약 결과 총 1만4376건이 접수됐다. 현장에서는 오는 15일부터 1순위 청약에는 이보다 적은 청약자들이 몰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미계약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는 상태다.

건설사 관계자는 사전이나 사후나 무순위 청약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계약분이 남은 물건을 '떨이'한다는 느낌이 있다"며 "어차피 미계약분을 팔거라면 사전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 당첨된 무주택자들, 자금조달 경험없어 포기 속출

숫자가 꼬이더라도 수차례 고쳤던 청약제도의 의도대로 '내집 마련이 절실한 준비된 무주택자'들에게 혜택이 간다면 관계 없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몰라서', '예상치 못해서', '생각지도 않게' 포기하는 청약자들의 숫자가 낮은 계약률을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분양 관계자는 "계약을 앞두고 자금이 부담되거나 부적격으로 나와서 포기하는 당첨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며 "'3년 뒤 분양받은 새 집이 분양가 보다 오를까'에도 확신이 없을 뿐더러 자금조달 계획서까지 쓰면서 굳이 분양받고 싶지는 않다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부적격자도 많지만, 계약을 포기하는 이유는 '자금 조달'과 관련된 의사결정이 대부분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막혀버린 대출길에 집값 상승도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당첨된 무주택자들. 내 집 마련 경험이 거의 없다는 건 자금 조달 경험이 없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당첨이 되고 계약을 앞두면서 의외로 고려해야할 상황이 많고 주변에서 조언도 쏟아진다. 이러한 무주택자들에게 '서울 분양가'의 허들은 너무 높다는 얘기다.

이렇게 나온 포기분들을 가져가는 건 '현금 부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이제는 모델하우스 현장에서 직접 밤새 줄서기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간편하게 온라인으로 줄서기를 하는 '무순위 청약'이 가능해졌다. 전국 단위의 현금 부자들이 서울에 집 하나 얻기가 더욱 쉬워졌다는 얘기다. 현금 부자들에게 경쟁률은 높지만, 아예 기회조차 없었던 줄서기보다는 새 집 장만하기가 더 간편해졌다.

또 다른 분양 관계자는 "무순위 사전 청약이 초반이기 때문에 아직은 가늠이 안된다"면서도 "나중에 사전 청약이 지역이나 나이별로 데이터가 집계돼 공개된다면, 사전 청약이 거품인지 현금부자들의 잔치인지가 판가름 날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하나의 R까기]는 부동산(real estate) 시장의 앞 뒤 얘기를 풀어드리는 코너입니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