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9) 1999년 8월 대우그룹 워크아웃 신청
[ 이태호 기자 ]
‘대기업그룹 채권 비중을 줄여라.’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실물경기 지표들이 회복세를 나타냈던 1998년 10월 27일. 금융감독위원회는 국내 투자신탁회사(현 자산운용회사)들에 회사채 투자 비중을 제한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동일 대기업그룹당 15% 이내’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적시했다.
‘대기업그룹의 자본시장 독점 해소’라는 명분을 단 이 지침은 투신사에 특정 채권의 ‘강력매도’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은행 자금줄이 끊긴 대기업그룹 한 곳이 회사채 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척간두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고양이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이냐. 공론화의 문제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틀 뒤인 29일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은 고심 끝에 완성한 4쪽짜리 보고서의 제목을 써내려갔다.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
세계 경영의 비극적 종착역
당시 대우는 자산총액 78조원(1998년 말)으로 현대에 이은 국내 2위 대기업그룹이었다. 1993년부터 ‘세계 경영’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사세를 급격히 확장한 결과였다.
국가 원수와 담판해 한 나라에 경제부흥 계획을 통째로 들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업계는 물론 경영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한 번 물꼬를 트면 무역회사 (주)대우를 선봉으로 자동차와 전자 등 광범위한 사업을 기러기 떼처럼 몰고 들어갔다. 관세와 법인세 면제, 용지 무상제공 등 각종 혜택까지 거머쥐며 승승장구했다. 대우의 1998년 7월 기준 해외 사업장은 500여 곳, 고용인력은 15만 명에 달했다. 현지 직원들은 1년의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내는 김우중 대우 회장을 세계를 정복한 칭기즈칸에 빗대 ‘김기즈칸’으로 불렀다.
문제는 막대한 투자 자금이었다. 세계 경영은 대규모 외화 차입을 필요로 했다. 현지 사업이 안정될 때까지 긴 시간을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차입금 만기 때마다 새로운 빚으로 기존 빚과 이자를 갚는 ‘페달’을 쉼없이 밟아야 했다.
외발 자전거에 오른 대우는 1997년 말 갑작스런 암초를 맞는다. 국제통화기금(IMF) 처방에 따른 ‘대기업그룹 재무구조 건실화’ 정책이었다.
돈키호테의 주장
“선진국 부채비율 잣대에 맞추라는 건 말도 안 돼요!”
김우중 회장은 IMF의 ‘고금리·차입축소’ 처방에 거세게 저항했다. 1998년 7월 31일 관훈클럽 조찬 간담회에선 공정거래위원회의 부채비율 200% 관리 목표를 맹비난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금리를 낮추고 정책적으로 수출을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정반대 논리를 폈다.
김 회장의 돌출 행동은 당시 경제 관료들과 번번이 파열음을 일으켰다. 김대중 정부 초기 경제 관료들은 강봉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김태동 경제수석 등 옛 경제기획원이나 학자 출신 개혁론자들이 주류를 이뤘다. 재벌과 국가 주도 경제발전에 비판적이어서 언론은 이들을 ‘신흥 관료’라 불렀다.
갈등의 골은 김 회장의 ‘무역흑자 500억달러론’을 계기로 더욱 깊어진다. 김 회장은 당시 환율이 폭등하자 ‘과잉·중복 투자’로 비판받던 설비의 완전 가동을 주장했다. 신흥 관료들의 눈에 그는 ‘빚더미에 앉은 대우를 살려보려는 돈키호테’처럼 비쳐졌다. 연초 정부의 공식 무역흑자 목표가 20억달러대에 불과했던 시기였다. 그들은 “지금 환율이면 돌멩이도 팔 수 있다”며 수출환어음(D/A)의 현금화 규제를 풀어달라는 김 회장의 요구를 끝까지 묵살했다.
엘리트 관료들의 자존심은 그해 상반기를 지나면서 휴지처럼 구겨진다. 한국 경제가 단군 이래 최대인 416억달러의 흑자를 낸 것이다. 수출은 비슷했지만 수입이 급감한 결과였다. 대우 홀로 전체 무역흑자의 3분의 1을 담당했다. 돈키호테의 씁쓸한 완승이었다.
관료들의 역공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분이…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다.”(1998년 10월 한 TV 대담에 출연한 김태동 당시 경제수석)
김 회장과 관료들의 갈등은 1998년 9월 김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오른 뒤 정점에 달했다. 환란 극복을 위해선 구조조정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일 때였다. 김 회장은 “정리해고는 없다”며 버텼다. 김대중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도 그의 배짱을 두둑하게 했다. 김 회장은 대통령 면전에서 경제 관료들을 ‘책상물림’으로 묘사하며 망신을 주기도 했다.
관료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대우의 차입금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금감위는 그해 7월 기업어음(CP) 한도제한(동일그룹 5%)에 이어 10월 회사채 한도 제한을 발표하면서 시장에 신호를 보냈다. 증권맨 출신 김정태 주택은행장과 삼성 금융계열사들이 먼저 알아채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우의 이자비용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1998년 11월 강봉균 수석은 김 회장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대통령에게 한 보고서를 올린다. 대우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고, 이자를 갚느라 번 돈을 다 쏟아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 고위 경제 관료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김우중을) 가만히 뒀다간 구조조정이고 뭐고 다 날아간다는 인식이 경제 관료들 사이에서 굳어져 있었다”고 털어놨다. 대우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위기에 빠졌다.
“모든 걸 내놓겠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소.”
1999년 7월 16일 서울힐튼호텔. 김 회장은 그의 집무실을 찾아온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자포자기 심정으로 물었다.
노무라의 ‘비상벨’ 보고서 이후 9개월. 생존을 위한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버린 때였다. 1998년 12월 발표했던 삼성과의 ‘빅딜’(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를 맞바꾸는 거래)은 이듬해 6월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 신청으로 틀어졌다. GM에 대우차 지분을 팔아 50억달러를 유치하려던 계획도 실패했다.
이 위원장은 그에게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내보였다. 안에는 △자동차 사업부를 그룹의 중심으로 남기고 △다른 주요 계열사를 모두 매각하고 △김 회장 소유 지분을 판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 회장은 2014년 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자구방안의 대가로) 자동차 관련 8개 계열사를 경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이었다”고 회고했다.
잠시 고민하던 김 회장은 “다 지키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사재 목록을 꺼내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직접 작성한 각각의 가격표를 읽어내려갔다. 주식과 부동산 등 사재 총 1조3000억원어치였다. 계열사 소유 10조원어치 주식도 모두 담보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훗날 대우그룹 운명의 날로 불리는 1999년 7월 19일. 제일은행 등 100여 곳의 채권금융기관들은 대우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김 회장의 자산과 회사 주식을 담보로 4조원의 신규 여신을 제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김 회장 경영권도 6개월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1개월여에 그쳤다.
대우, 통째로 워크아웃 수렁에
‘코스피지수, 904.96으로 사상 최대 71포인트(7.3%) 폭락.’(1999년 7월 23일)
거함 대우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대우그룹 주식은 연일 동반 하한가로 직행했다. 투자자들이 대우 채권을 담은 수익증권 환매에 나서면서 채권금리도 폭등했다. 금감위가 7월말부터 창구지도로 기관의 환매를 틀어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루 1조원 넘는 환매 요구가 몰리며 자본시장은 시한폭탄으로 변해갔다.
결국 관료들은 뇌관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대우와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등 12개 주요 계열사를 한꺼번에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에 집어넣기로 합의했다. 김 회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법정관리와 워크아웃을 놓고 고민하던 끝에 8월 26일 동의서를 건넸다. 같은 날 채권금융기관들은 세계를 누볐던 32년 대우그룹사의 종말을 발표했다.
김대중 정부는 김 회장에게 ‘대우에서 손을 떼라’며 출국을 종용했다. 김 회장은 훗날 “(김 대통령으로부터) 3~6개월만 나가 있으면 정리해서 잘 되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워크아웃만 잘 끝나면 자동차사업은 경영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김 회장은 1999년 10월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을 빠져나간 뒤 2005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수배자 신세로
대우 사태가 일반적인 워크아웃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그의 출국 직후 충격적인 실사 결과가 나오면서였다.
금융감독원은 1999년 11월 워크아웃 대상 계열사 중간실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대우에 천문학적인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다. 장부에 92조원으로 잡혔던 자산이 61조원으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대우에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시장 신뢰마저 산산조각났다. 여론은 경영진 문책론으로 들끓었다.
금감원은 1999년 12월 대우 특별감리반을 출범시키고 2000년 9월 15일 분식회계 등 혐의로 대우 임직원 52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2005년 4월 대법원은 대우 관계자들에게 실형과 함께 23조원의 추징금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 회장 몫은 18조원, 사법사상 최대 추징금이었다.
김 회장은 여전히 대우 분식이 지나치게 과장돼 있다고 말한다. 그는 “멀쩡한 기업을 다 죽었다고 해놓고…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며 “나는 경제 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