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공장 멈출 판…기업 '산안法 패닉'

입력 2019-04-09 17:45
수정 2019-04-10 09:16
'묵살' 된 경총·반도체업계 요구

시행령에 구체적 기준 없어
작업 중지명령 '남발' 우려


[ 좌동욱/백승현/박상용 기자 ] 기업들이 ‘초비상’이다. 정부의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시행령 개정안 확정이 이달 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행령 및 시행규칙 등 하위 법령에 담긴 모호한 기준 탓에 산업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 원청업체가 ‘무한책임’을 질 판이라는 게 기업들의 호소다. “생산현장이 툭하면 공장 가동을 멈추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본지 3월 5일자 A10면 참조


9일 경제계에 따르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최근 산안법 하위 법령 개정을 앞두고 ‘경영계 의견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했다. 산안법에 반영된 △유해·위험작업 도급 금지 △사업장 근로자 안전에 대한 원청업체 책임 확대 △고용부 장관의 작업중지 명령권 등의 명확한 기준을 시행령 또는 고용부 지침에 넣어 달라는 요구를 담았다. 이와 별도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업체들은 ‘산안법 하위 법령 개정 요구안’을 냈다. 하지만 모두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시행령에 작업중지 명령의 구체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 등 모호한 문구만 가득해 작업중지 명령이 남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한 대기업 임원은 “정부의 초안대로 시행령이 확정되면 걸핏하면 공장을 세워야 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 번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 수천억원에서 조(兆) 단위의 피해를 볼 우려가 있다”고 하소연했다.

유해하거나 위험한 작업의 도급(하청)을 규제하는 도급승인제도 걱정거리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을 모두 원청업체가 맡을 경우 기존 협력업체는 줄도산하고 직원들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도급 승인 대상 작업은 재하도급을 전면 금지한 조항 탓에 영세업체들은 설 자리조차 없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기업이 망하는데 안전만 남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고용부는 이달 말 산안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한다. 산안법은 내년부터 시행된다.

"멈추면 수천억 손실인데"…단순 실수로 사고나도 반도체공장 '올스톱'

2017년 10월 22일 충남 금산군 한국타이어 3공장. 직원 A씨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고용노동부는 사고 발생 즉시 3공장뿐만 아니라 1, 2, 4공장과 물류공장까지 작업을 전면 중단시켰다. 회사 측은 “물류공장은 사고와 관련이 없다. 출고 예정인 타이어도 있어 피해가 너무 크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고용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후 물류공장의 작업중지 조치가 풀리는 데 6일이 걸렸다. 국내 한 자동차회사 대표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으로 원청업체의 책임과 의무가 대폭 강화됐지만 작업중지 명령을 내리거나 푸는 판단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며 “산안법 때문에 해외로 나가겠다는 기업까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작업중지 명령 남발 우려

9일 정부와 경제계에 따르면 고용부는 이달 말 산안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한다. 사전 의견수렴 과정에서 시행령 주요 조항을 확인한 국내 주요 기업은 아연실색했다. “이대로라면 국내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모호한 시행령 기준이다. 기업 경영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작업중지 명령권이 대표적이다. 법에는 작업중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을 ‘중대 재해가 난 작업과 동일한 작업’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 ‘산업재해가 확산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등 불가피한 경우’ 등으로 광범위하게 정해놨다.

기업들은 “시행령 또는 시행규칙에 감독관의 자의적 해석을 방지할 세부 기준을 정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고용부는 이에 대해 “업종이나 기업별로 다른 기준을 시행령에 세세하게 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은 작업중지 명령이 남발될 가능성이 크다고 걱정한다. 국내 10대 그룹 계열사의 안전담당 임원은 “정부 방침대로라면 일단 사망 사고와 같은 중대 재해가 발생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공장 가동이 중단될 것”이라며 “나중에 사고 원인이 해당 직원의 부주의로 밝혀져도 이미 난 손실을 보상받을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작업중지 명령이 국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한 반도체 업체 대표는 “세계 D램 가격 폭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삼성전자 평택반도체 공장의 가동 중단 여부를 비전문가들이 단시간에 결정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하청업체 연쇄 도산 가능성

개정법에 신설된 도급승인제도에 대한 업계의 우려도 크다. 하청업체들의 재해사고가 잇따르자 과거 도급인가제를 강화한 게 도급승인제다. 고용부는 입법 당시 “황산 불산 질산 염산 등 1, 2등급 발암물질을 취급하는 작업을 대상으로 도급승인 범위를 시행령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재계에선 “사망 사고가 난 작업들이 도급승인 대상에 하나하나 추가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실제 고용부는 컨베이어벨트 사고가 잇따르자 ‘컨베이어벨트 작업과 같은 위험한 작업’을 시행령의 도급승인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자동차업계의 한 관계자는 “도급승인 대상이 되면 고용부로부터 3년 단위로 도급 가능 여부를 허가받아야 한다”며 “정부의 눈치를 더 보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더 큰 문제는 도급승인 대상 작업은 재하도급이 전면 금지된다는 점이다.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개정된 산안법에 따르면 황산 불산 질산 염산 등의 물질을 사용하는 작업은 예외 없이 재하도급이 금지된다”며 “내년 1월 법이 시행되면 적지 않은 하청업체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주요 대기업도 기존에 하도급을 주던 일감을 본사가 직접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도급승인 제도는 제2의 최저임금제와 같은 탁상공론 제도”라고 꼬집은 이유다.

실효성 떨어지는 조항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캐디 등에 대한 고객응대 관련 지침 마련과 정기 교육 의무 등을 고용주에게 부과한 게 대표 사례로 꼽힌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산업재해를 예방한다는 취지다. 캐디의 경우 미끄럼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화 착용 의무까지 시행규칙에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체들도 황당한 규제를 하소연한다. ‘용접 또는 용단 작업 때 불꽃이 튀는 용접 반경(비산거리) 11m 내 가연물이 있을 경우 화재감시자를 배치하라’는 조항이 대표적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광범위한 조선소 야드에 화재 감시자를 11m 단위로 세워야 할 판”이라고 했다.

백승현/좌동욱/박상용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