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산업은 소비자 가치가 중요
전통시장·골목상권 보호는커녕
다른 상인 괴롭히는 규제 말아야
황인학 < 한양대 특임교수 >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조선시대 상인과 시장에 대해 김대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 펴낸 책의 제목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백성이 먹고사는 필요에 의해 전국 각지에 5일장이 생기자, 사대부들은 시장 때문에 도적이 횡행한다며 시장을 열지 못하게 막으라고 왕에게 주청한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 중에도 장돌뱅이 같은 직업 상인이 생기지 않도록 시장 개설일을 전국적으로 통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가 있었다. 이처럼 사농공상 신분제를 지키기 위해 시장을 억압하고 상공업의 발전을 막았던 사대부에 의해 조선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졌고 백성은 더욱 궁핍해졌다.
국회에 발의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보면 조선시대의 ‘시장 억압 DNA’가 오늘날 정치권에 전승되고 있는 듯하다. 20대 국회에서 지금까지 발의, 계류 중인 이 법 개정안 수는 총 37건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이 영업의 자유를 제한하고 경쟁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전통상업보존구역의 범위를 2㎞로 늘려 대형마트의 신규 출점을 봉쇄하겠다, 복합쇼핑몰은 공휴일을 포함해 매달 이틀씩 문을 닫게 하고, 대형마트 의무 휴업일은 이틀에서 나흘로 늘리겠다는 식이다.
국회에 발의된 이 같은 유통산업 규제 법안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사회후생 극대화 원리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산업정책의 목적은 사회 전체의 후생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사회후생은 사업자 잉여와 소비자 잉여의 합계다. 유통업은 사업자보다 소비자 가치가 더 중요한 산업이다. 수많은 상품이 소비되는 유통산업은 소비자 가치를 중심에 두고 사업자 간 가격, 품질, 서비스 경쟁을 촉진하는 정책이 국민 전체의 후생 극대화 원리에 부합한다. 유통산업 규제 법안은 경쟁 촉진이 아니라 경쟁자(사업자)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므로 산업정책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
둘째, 규제 법안이 통과돼도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이 보호되는 효과는 작고, 일자리를 줄이는 ‘규제의 역설’을 초래할 우려는 크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은 중소상인을 보호하겠다며 2010년에 대규모 점포 등의 전통시장 1㎞ 이내 등록을 제한했고, 2012년에는 대형마트 등의 월 2회 의무휴업 규제를 신설했다. 대형마트 영업을 규제하면 소비자들이 전통시장으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규제를 강화하려면 과거 시행한 규제의 득실부터 따져야 한다. 2012년 규제 시행 이후 대형마트는 물론, 전통시장 매출액도 덩달아 감소했다. 대형마트는 의무 휴업 규제 이후 매출액이 5년 동안(2012~2016년) 연평균 2.4%씩 줄었다. 전통시장 매출액은 규제 이전에 평균 21조8000억원에서 규제 이후 물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20조6000억원으로 감소했다. 소비자는 대형마트 규제를 피해 전통시장에 가는 대신 온라인 쇼핑, 동네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형마트 규제가 주변 상권의 침체를 부추겼다는 연구도 있는 만큼 이 시점에서 규제를 확대, 강화해서 얻을 실익은 없다.
셋째, 유통산업 규제 법안은 공정성 원칙에도 어긋난다. 중소상인을 보호하겠다는 규제 법안이 또 다른 중소상인을 괴롭히는 결과를 빚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롯데월드타워몰의 경우 입점업체 209곳 중 156곳(74.6%)이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서 정한 중소기업이다.
복합쇼핑몰 의무휴업을 강행하면 중소상인의 매출액과 고용이 감소할 게 뻔하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복합쇼핑몰 규제로 입점 소상공인 매출은 5.0%, 고용은 3.9%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래도 국회가 규제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규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