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업 발전 뒷받침해온 국가 R&D
이젠 미세먼지 저감, 고령화 대응 같은
당면한 공공문제 해결 위해 적극 나서야
박수용 < 서강대 교수·컴퓨터공학 >
1, 2월은 대학교수들이 조금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기다. 반면 일부 공대 교수들은 매우 분주하게 보낸다. 대부분의 정부 연구개발(R&D) 과제 제안서 선정이 1, 2월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공대 교수들은 이 시기를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여긴다. 제안한 연구과제가 탈락하면 연구실 학생들의 지원 및 연구 수행에 큰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연구과제 선정에 경쟁률이 높아져 해당 분야에서 이름이 있다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평가도 매우 까다롭게 해 필자도 지난겨울을 정신없이 보내야 했다. 평가를 받으면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제안한 연구과제가 얼마나 산업체에서 활용될 것인가’이다. 때로는 산업체 기술이전 목표 액수를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대학 연구실의 연구가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는 당연한 것이지만 필자에게는 우리나라 국가 R&D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다.
1960~1970년대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여러 산업기술의 도움이 필요했다. 기업들의 기술 경쟁력이 미미했던 당시에 이를 뒷받침해준 것은 국가 연구소들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시작으로 전자통신연구원 등 여러 정부출연연구소가 설립됐고 국내 산업 발전의 기초를 놓은 수많은 기술이 개발됐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우리 산업이 규모와 질적인 측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기업들의 R&D 경쟁력도 높아졌다. 일부 산업기술 분야는 기업이 정부연구소를 앞지르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때로는 기업들이 잘하고 있는 기술을 정부출연연구소가 중복 개발한다느니, 우수한 박사 인력이 기업으로 몰리면서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가 인재 영입 경쟁을 벌인다느니 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연구 환경의 변화를 보면 대학의 연구실과 정부출연연구소는 이제 산업기술 개발에서 벗어나 좀 더 도전적으로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노력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당면한 미세먼지 문제,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진행된다는 고령화 문제, 여전히 엄중한 남북 간 대치 문제 같은 국가적으로 커다란 문제에 대해 과학기술 차원에서 해결책을 제시할 연구개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은 국방과 물 부족이란 두 가지 국가적 과제를 과학기술 차원에서 연구개발해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국방기술과 담수화 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이런 기술들은 산업체로 흘러들어가 효자 산업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국가 발전 전략을 기존의 ‘추격형(fast follower)’에서 ‘선도형(first mover)’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도 국가 R&D 목표를 산업체 필요 기술 개발에서 국민이 당면한 공공의 문제 해결 기술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미세먼지 문제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귀에 즐거움을 주는 헤드셋이 코에도 좋은 공기를 불어넣는 방법은 없을까. 급속히 늘어나는 독거노인을 수발할 로봇을 만들 수는 없을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휴전선과 수많은 초소를 대체할 최첨단 경계 시스템을 개발할 수는 없을까.
필자의 단편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든 예시이긴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R&D가 국민과 공공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원천이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문제들은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가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한다. 연구과제 평가에서도 제안된 연구가 국민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미세먼지 공포가 세계적인 히트 상품을 만들어내고, 고령화 추세의 어두운 그림자가 로봇산업을 발전시키고, 분단의 아픔이 신성장동력으로 승화되는 ‘역전의 명수’ 대한민국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