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무력으로 점령한 땅은 영토가 아니다

입력 2019-04-07 16:34
국제질서 원칙 흔든 美 골란고원 주권 선언
中 남중국해 영해 주장에 영향 미칠까 우려
일본과 힘을 합쳐 공동의 위험에 대처해야

복거일 < 사회평론가·소설가 >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원래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이 52년간 점령했으니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1948년 이스라엘이 탄생했을 때 그 둘레의 아랍 국가들은 연합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힘든 싸움에서 이긴 이스라엘은 살아남았다. 이후 아랍 국가들이 공격할 때마다 이스라엘은 이겼고 점령지를 넓혀나갔다. 아랍 국가들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표로 내걸었으므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들을 전쟁이 끝나도 계속 점령하는 것을 국제사회는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그래도 그런 상태는 정상적이지 않다.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빨리 자신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 비록 골란고원에 국한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장애가 된다.

그의 발언은 물론 유대계 시민들의 호감을 얻어 다음 선거에서 이득을 보려는 속셈에서 나왔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면, 세상의 기본 질서도 서슴없이 허물겠다는 태도를 줄곧 보여온 그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문제적이어서, 그 영향은 중동의 평화를 어렵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강대국이 무력으로 병합한 땅은 결코 영토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국제질서의 원칙이다. 이번 발언은 그 원칙을 뿌리째 흔든다. 당장 영향을 받는 것은 러시아가 무력으로 병합한 크림반도다. 우크라이나는 힘이 없어 영토를 빼앗겼지만, 국제사회는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세계는 러시아에 경제적 제재를 가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자유세계가 러시아에 대해 어렵사리 시행해온 경제적 제재의 권위와 강도를 크게 훼손했다.

우리에게 훨씬 위협적인 것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미칠 영향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대부분이 자기 영해라고 주장해왔다. 주장의 근거는 국민당 정권 시절의 지도에 그려진 9개의 선분이다. 많은 자료들은 이런 ‘역사적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래도 중국은 무력으로 위협하면서 남중국해의 암초들을 점령하고 군사 시설을 설치해왔다.

2014년 필리핀은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해 중국의 행위들이 불법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중국은 곧바로 불복했다. 미국과 일본은 판결이 나오기 전부터 판결을 존중하라고 중국에 요구했다. 한국에도 그런 요구에 동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은 판결이 난 뒤에야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일방적 주장과 행동으로 모든 외교적 노력이 실패해 국제기구의 중재 판결을 얻어냈는데, “외교 노력” 타령을 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중대한 외교 실패였다.

남중국해는 우리의 생명선이 지나는 바다다. 그 바다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에서 우리는 비겁했다. 얻은 것은 중국의 경멸뿐이다. 이후 우리는 ‘사드 보복’을 당했고, 중국의 보복에 항의 한마디 하지 못하자 더 큰 경멸을 받아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을 수행한 기자와 경호원이 중국 민간인들에게 얻어맞았다. 그러고도 중국에 범인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냈으니, 다음엔 무슨 봉변이 나올까.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이번 일을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남중국해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에서 두 나라는 협력해야 한다. 중국이 점점 강해지고 점점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이므로, 그런 협력은 점점 절실해진다.

두 나라를 우방으로 만드는 요인은 또 있다.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 중국은 거세게 대립한다. 중국은 이어도를 수얀 암초(Suyan Rock)라고 부르면서 할양해 달라고 한국에 요구한다. 이어도는 늘 수면 아래에 있으므로 바다에 대한 영유권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81해리고 중국 땅에서 147해리이므로 이어도는 분명히 한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에 속한다.

일본은 한국의 이익이 가장 많이 합치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와 함께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외교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