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혁 지식사회부 기자) “피의사실 공표는 실정법상 범죄 아닌가요? 법을 집행하는 최고기관인 검찰이 스스로 현행법을 위반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아닐까요?”
4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여야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검찰이 공판을 청구하기 전에 피의자의 혐의사실 등을 공개하는 ‘피의사실 공표’ 관행을 근절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재판은커녕 수사도 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사기관이 혐의사실 등을 들춰내면 피의자가 ‘유죄’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어 그의 방어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피의자의 기본권 신장을 위해 모처럼 국회가 한마음 한뜻을 갖게 된 걸까요? 여야 의원들의 말을 더 들어보니 겉으론 같은 주장을 펼치지만 속내는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이 피의사실을 공표한 검사에 대해 감찰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포문을 열었습니다. 장 의원은 김성태 전 한국당 원내대표 딸의 KT 취업특혜 의혹을 수사하는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는 “남부지검이 김 전 원내대표의 피의사실을 생중계하고 있다”면서 “사실 여부도 확인 안 한 일방적 진술에다 공소시효가 지나 법적 판단이 될 수 있는 사안도 아닌 내용을 검찰이 유포한 것은 아주 악질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야당 의원들도 연이어 남부지검의 김 전 원내대표 관련 피의사실 공표를 질타했습니다. 이은재 한국당 의원도 “야당과 김성태를 죽이려 작정한 것”이라고 밝혔고, 같은 당의 주광덕 의원도 “특정 야당 정치지도자에 대한 흠집내기를 넘어 망신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여당 의원들도 검찰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근거 사례는 달랐습니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수사하는 서울동부지방검찰청을 언급했습니다. 송 의원은 “검찰이 의도적으로 수사 상황과 소환 일정 등을 공표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동부지검은 지금 완전히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의원들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대목입니다. 사실상 각 당이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피해사실 공표행위 처벌을 주장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여야 모두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하지만 이들이 직접 나서 김성태 전 원내대표와 김은경 전 장관에 대한 ‘유죄 확증’을 갖고 수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현행법상 피의사실 공표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5년 이하 자격정지’에 처할 수 있는 엄연한 위법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국민의 알권리 충족 등을 이유로 위법성이 조각돼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을 정도로 현재로선 유명무실한 조항입니다. 최근 국민의 인권의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관행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국회가 먼저 나서 이러한 논의에 군불을 떼는 것은 일면 바람직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날처럼 단순히 ‘내편 지키기’식으로 접근해선 진전이 없을 것이란 지적이 나옵니다. 검찰, 국회, 언론, 정부 등 관계자들이 ‘피의자의 방어권’과 ‘국민의 알권리’라는 두 가치 사이 균형을 맞출 지혜를 진지하게 모아야 할 때입니다. (끝) /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