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1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0.5% 그쳐
경기침체 따른 수요 위축
석달째 1% 밑돌아
[ 김일규/임도원/고경봉/성수영 기자 ]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올 들어 석 달 연속 0%대에 그쳤다. 1분기 상승률은 0.5%로, 분기별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5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위축으로 저물가 상태가 장기간 이어지는 ‘디플레이션 공포’ 우려가 커지고 있다.
통계청이 2일 발표한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 3월 물가는 작년 3월에 비해 0.4% 상승하는 데 그쳤다. 2016년 7월(0.4%) 이후 2년8개월 만에 가장 낮은 상승률이다. 지난해 연간 1.5%였던 물가 상승률은 올 1월 0.8%로 떨어진 데 이어 2월(0.5%) 3월(0.4%)까지 3개월 연속 1% 미만에 머물렀다. 올 1분기 상승률은 0.5%로 분기 기준 사상 최저 수준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채소류(-12.9%) 석유류(-9.6%) 등 일부 품목의 일시적 가격 하락에 따른 공급 측 요인이 크다”고 설명했다. 겨울이 지나면서 농산물 출하량이 늘었고 고공행진을 하던 국제 유가도 올 들어 하락세로 돌아선 점이 저물가에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여기에 고교 무상급식 확대 등 정부의 복지정책에 따른 관리물가 하락 영향도 있다는 설명이다. 유류세 인하 기간이 끝나는 5월 이후엔 물가 상승률이 1%대로 올라갈 것이라는 게 정부와 한은의 전망이다.
경제학계에선 그러나 공급 측 요인보다는 경기 하강에 따른 수요 부진이 물가를 끌어내리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이 때문에 물가가 일시적이라기보다는 지속적,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된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변동폭이 큰 식품과 석유류를 제외한 물가)도 0.8% 상승하는 데 그쳤다. 2000년 2월(0.8%) 이후 19년1개월 만에 가장 낮은 상승률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전반적으로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디플레이션이 닥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개 든 디플레 논쟁…"소비 침체發 불황 전조" vs "유가 하락 영향 커"
올 들어 물가 상승률이 전례없이 낮은 수준으로 둔화되자 학계에서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가시화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0.5%로 분기별 통계가 처음 나온 1965년 이후 가장 낮았다.
정부는 국제 유가 하락과 이례적인 농산물 출하 급증, 무상복지 확대 등에 따른 일시적 요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소비 위축에 따른 수요 부진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공급 측 요인만으로 설명하기엔 최근 물가 상승률이 지나치게 낮다는 주장이다. 체감경기가 냉랭해진 상황에서 올 들어 수출 부진, 글로벌 성장 둔화 등이 부각되다 보니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은 게 아니냐는 얘기다.
수출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에서 내수 시장까지 한층 더 위축돼 소비 침체→기업 수익 감소→투자·고용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가중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계절적 요인에 따른 농산물 가격 하락 효과가 소멸되고 유류세 인하 기간이 끝나는 2분기에 물가 상승률이 예년 수준을 회복할지가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이례적 물가 하락 왜?
정부와 한국은행 등은 디플레이션에 대해 “가능성이 낮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으로 장기간 저물가가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최근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둔화된 것은 주로 공급 측 요인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난겨울 이례적으로 온화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농산물 출하량이 크게 늘었고 지난해 상반기 고공행진을 하던 국제 유가도 연말 이후 하락세로 돌아선 점을 배경으로 들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을 품목별로 보면 유가와 농산물 가격의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석유류는 1년 전보다 9.6% 하락하며 전체 소비자물가를 크게 낮추는 효과를 냈다. 농·축·수산물 가격도 0.3% 떨어졌다.
여기에 정부가 공공요금과 의료비 등 관리물가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유류세까지 인하했다. 한은 관계자는 “3월 새학기 전후로 지방자치단체별로 무상급식, 무상교복 등의 혜택을 확대한 점도 소비자 물가를 낮추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3개월 연속 0%대 상승률이라는 이례적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유가 등 에너지 부문과 농산물 등 식료품 부문을 제외한 근원물가도 3월에 0.8% 상승에 그쳤다. 1%대가 무너진 것은 2000년 2월 이후 19년1개월 만에 처음이다.
한은은 관리물가를 제외한 근원물가 등을 통해 물가 움직임이 기조적인지 파악한다. 전문가들은 3월 이 수치도 2000년대 이후 최저 수준인 0.9~1% 선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에너지, 농산물, 공공복지 등 공급 측면의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물가가 이례적으로 바닥을 기고 있다는 얘기다.
일시적 물가 둔화 vs 일본식 장기불황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1일 기자간담회에서 “물가 둔화는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유통구조 혁신과 온라인 거래 확산 등 구조적 문제와 농산물 가격과 유가 하락 등 일시적 문제가 겹친 데 따른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도 “장기 불황으로 해석하려면 물가 상승률이 적어도 1년 정도는 마이너스로 가야 한다”며 “현재 추이만 가지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2%대 저성장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경기 침체가 심해지고 있어 자칫 일본식 장기 불황의 시작점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크다. 이인실 한국경제학회장(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은 “지금 한국은 성장률이 잠재성장률을 밑돌면서 디플레 압력을 거세게 받고 있다”며 “1분기 이례적인 물가 상승률 둔화는 그 압력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도 “경기 하강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은 이상 징후”라며 “디플레이션은 가능성이 낮지만 한번 오면 그 충격은 경제위기보다 더 큰 만큼 유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이미 디플레이션이 진행 중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한국은 고성장을 이어오는 동안 물가 상승만 걱정했지 한번도 디플레이션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며 “저성장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경제 활력이 사라지면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정부가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일규/임도원/고경봉/성수영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