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통신, 미국의 '빅딜문서' 5대 요구사항 보도
"사실상 '리비아 모델'" 분석
쉽지않은 韓 '굿 이너프 딜'
[ 주용석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건넨 ‘빅딜(일괄타결)’ 문서에 “핵무기를 미국에 넘기라”는 요구사항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핵무기를 미국으로 반출해 미국이 직접 제거하겠다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미, “핵무기·연료 미국으로 이전” 요구
로이터통신은 지난 29일 빅딜 문서와 트럼프 행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미국은 북한 핵무기와 핵연료(핵 원료물질)의 미국 이전과 모든 핵시설 및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생화학무기 폐기까지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또 북한 핵무기의 미국 이전 외에 △포괄적 핵 신고와 국제 사찰 허용 △핵 활동 동결 및 새 시설물 건설 중단 △핵 인프라 제거 △핵 분야 과학자·기술자의 전직(상업활동으로 전환)을 함께 요구했다고 전했다. 미국이 빅딜 문서에서 5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는 의미다.
빅딜 문서의 존재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미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밝혔다.
주목되는 건 그동안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미국의 요구 조건이 훨씬 세다는 점이다. 북한 핵무기와 핵 원료물질을 미국에 넘기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북한은 수십 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면서도 영변 핵시설 등을 가동해 플루토늄, 우라늄 등 핵무기 원료물질을 계속 생산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미국 영토로 반출해 직접 없애겠다고 한 것이다. 핵 과학자와 기술자의 전직을 요구한 점도 눈에 띈다. 이는 북한이 비핵화 완료 후 상황에 따라 다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여지를 최대한 없애려는 포석이다. 미국은 옛소련 국가들의 비핵화 과정에서 이 같은 방안을 담은 ‘넌-루가 모델’을 적용한 적이 있다.
미국이 빅딜 문서에서 제시한 방안은 북한이 꺼리는 리비아 모델보다 수위가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리비아 모델은 먼저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이를 검증한 뒤 수교와 경제 지원 등을 제공하는 ‘선(先) 핵 폐기, 후(後) 보상’ 방식이다. 대북 강경파인 볼턴 보좌관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북핵 해법이다. 반면 북한은 “패전국에나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며 리비아 모델을 거부해왔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볼턴이 얘기한 것보다 훨씬 센 수위라 놀랐다”며 “볼턴이 얘기한 리비아 모델은 핵 폐기에 집중돼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얘기한 건 뿌리까지 싹 다 없애겠다는 의미라서 북한이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굿 이너프 딜’로 미·북 설득 가능할까
물론 미국이 5대 요구사항을 즉시 이행하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은 작다. 한국과 미국이 그동안 밝힌 비핵화 입장에 비춰볼 때 미국은 일단 북한과 ‘완전한 비핵화’라는 큰 틀의 합의를 이룬 뒤 구체적인 비핵화 순서를 정한 로드맵을 만들려고 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반면 북한은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일부 또는 전체 폐기를 대가로 유엔의 핵심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단계적 해법을 고집했다. 이 같은 미·북 간 극명한 견해차로 인해 하노이 회담은 ‘노딜’로 끝났다.
문제는 이 같은 이견을 좁힐 수 있느냐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는 빅딜과 북한이 주장하는 단계적 해법의 절충점으로 ‘굿 이너프 딜(충분히 괜찮은 거래)’을 제시하고 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외에 강선 우라늄 시설 등을 추가로 폐기하는 대가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일부 제재를 푸는 방안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11일 워싱턴DC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런 방안을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빅딜’로 입장을 정리했다. 문재인 정부가 ‘굿 이너프 딜’ 카드로 미·북 모두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