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묻는 기업…컨설팅업계는 호황
삼성·LG·LS 등 의뢰 몰려
"산업의 판 완전히 달라져
당장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 오상헌/고재연 기자 ] LS산전은 제조업체에서 서비스업체로 ‘변신’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변압기 차단기 등 기존 제조업에 안주했다가는 중국 업체에 조만간 따라잡혀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다.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는 사물인터넷(IoT)을 활용해 변압기 원격 점검, 부품 교체 등 서비스업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롤랜드버거, PTC 등 7개 컨설팅업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학성 LS산전 DT(디지털 전환) 총괄사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잠깐 졸면 죽는다’는 걱정에 컨설팅회사 문을 두드렸다”고 말했다.
컨설팅업계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산업의 ‘판’이 바뀌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주력 사업을 고도화하고, 새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기업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경기 침체와 실적 부진, 각종 규제로 앞이 안 보이는 미래 불확실성이 기업들을 컨설팅 의뢰로 내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기업들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낙오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씻어내기 위해 컨설팅업체를 찾고 있다”며 “지난해 하반기부터 컨설팅 의뢰가 급격히 늘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컨설팅회사에 주로 의뢰하는 내용은 △현재 주력 사업의 디지털 전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신사업 발굴 △인수합병(M&A) 전략 등이다. LG유플러스는 베인&컴퍼니와 손잡고 CJ헬로 인수 후 시너지 창출 전략 등을 짜고 있다. LG전자는 인공지능(AI) 전문 컨설팅업체인 엘리먼트AI와 AI 로드맵을 그리고 있다. 대우건설은 지난해 맥킨지의 경영진단 결과를 토대로 사업 재편, 중장기 성장동력 발굴 등을 맡는 기업가치제고본부를 신설했다.
접느냐, 새판이냐…미래전략 사활 건 기업들, 컨설팅에 'SOS'
매일유업이 토종 컨설팅 업체 룩센트의 문을 처음 두드린 건 2년여 전이었다. 우유 소비 감소로 떨어진 수익성을 공장 효율화를 통한 비용 절감으로 메우기 위해서였다. 1년여 뒤 공장 효율화 작업이 궤도에 오르자 매일유업은 룩센트에 새로운 ‘숙제’를 냈다. “유가공 사업으로는 한계가 있다. 새로 뛰어들 만한 사업을 같이 찾아보자”는 요청이었다. 포장재 사업 등 매일유업의 신사업은 이렇게 나왔다. 오승목 룩센트 대표는 “한계에 부딪힌 제조업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며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컨설팅 업체를 찾는다”고 설명했다.
컨설팅사 문 두드리는 기업들
요즘 기업들이 컨설팅 회사에 가장 많이 맡기는 일감은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DT)’ 프로젝트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생산·판매·물류 등 모든 시스템을 디지털화해 효율을 높이고 비용은 줄이기 위해서다. ‘스마트 공장’ 구축이 대표적인 예다. 삼성전자, LS니꼬동제련 등 많은 기업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거나 이미 끝냈다. SK브로드밴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조직체계를 갖추기 위해 맥킨지의 도움을 받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처럼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한 ‘애자일(agile·기민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사업구조 재편+신사업 발굴+인수합병(M&A) 대상 물색’ 등으로 이뤄진 패키지 컨설팅을 의뢰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가만히 있다간 서서히 말라죽는다. 더 늦기 전에 사업구조를 바꿔야 한다”(한 중견기업 대표)는 절박감에 컨설팅 회사에 ‘SOS’를 친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 LG화학처럼 ‘글로벌 리더’ 반열에 오른 기업들이 컨설팅 업체에 맡기는 프로젝트는 일반 대기업과 사뭇 다르다. 사업구조 재편, 신사업 발굴 등 회사의 사활이 걸린 일은 직접 한다. 컨설팅 업체에는 주로 새로운 시장 트렌드와 경쟁업체 동향 분석 등 ‘정보 수집’을 주문한다. 그러다 보니 1~2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는 많지 않다. 대신 몇 달 안에 해결할 수 있는 단기 프로젝트를 동시다발적으로 내준다.
삼성전자는 '컨설팅 회사를 끼고 산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컨설팅 업체 관계자는 “과거엔 대다수 대기업이 어쩌다 한 번씩 장기 프로젝트를 발주했다”며 “최근에는 대기업과 컨설팅 회사가 ‘장기 파트너십’을 맺고 각종 현안을 함께 고민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특수 맞은 컨설팅 회사들
사모펀드(PEF) 시장이 활성화된 것도 컨설팅업계가 호황을 맞는 데 한몫했다. M&A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른 PEF들은 사들일 만한 기업을 고를 때와 매입한 기업의 경영효율을 끌어올려야 할 때 컨설팅 회사의 ‘훈수’를 받는다. 소규모 인력으로 다양한 업종의 기업을 사고파는 PEF 특성상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진단과 분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룩센트가 설립 10여 년 만에 중견 컨설팅 업체로 성장한 것도 PEF 덕분이다. 그동안 VIG파트너스(바디프랜드), MBK파트너스(두산공작기계), IMM PE(태림포장),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오비맥주) 등 10여 개 PEF를 도왔다. 이공계 출신 컨설턴트를 대거 채용해 생산·판매·물류 현장의 비효율을 찾아낸다. 새나가는 돈을 막아주는 식으로 PEF가 인수한 기업의 수익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요가 늘어나자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베인&컴퍼니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PEF 시장을 뚫기 위해 전담 조직까지 신설했다.
‘주 52시간 근로제’도 컨설팅 업체들의 일감이 늘어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대기업 근로자들의 근무시간이 줄어들면서 과거 임직원들이 직접 하던 시장 조사 등의 업무를 컨설팅 업체에 맡기고 있어서다. 컨설팅업계 관계자는 “다음달부터 주 52시간 근로제 계도기간(처벌 유예기간)이 끝나면 일감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했다.
컨설팅 시장이 커지면서 ‘뉴 페이스’도 속속 진출하고 있다. 인공지능(AI)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엘리먼트AI가 대표적이다. 캐나다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한화 등으로부터 투자받은 AI 전문 연구소로 출발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AI 관련 정보 및 기술을 바탕으로 한화손해보험에 이어 LG전자 등 대기업들의 AI 사업을 조언하고 있다.
오상헌/고재연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