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
폴 레버 지음 / 이영래 옮김
메디치 / 396쪽 / 1만8000원
[ 서화동 기자 ] 2014년 말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뽑을 때였다. 유럽의회의 대규모 그룹인 유럽국민당이 후보로 내세운 룩셈부르크 총리 출신 장클로드 융커에 대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소리 높여 비난했다. 융커가 집행위원장이 된다면 영국이 EU 회원으로 남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스웨덴 헝가리 총리도 융커는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융커를 지지하는 것이 명확해지자 프랑스 이탈리아 등 중립적 태도를 취하던 나라들은 물론 스웨덴 네덜란드 등도 태도를 바꿨다. 영국과 헝가리 총리만 반대표를 던졌다. 결과는 영국의 패배로 끝났다.
영국에서 최고 유럽 전문가로 통하는 폴 레버 전 왕립군사문제연구소장은 이를 “EU에서 영국이 취하고 있던 태도의 근본적인 딜레마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영국은 유럽의회에서 영향력도 전혀 없고, 유럽의회가 권력을 잡는 걸 반대하도록 동료 회원국들을 설득할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오는 29일로 예정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연기를 둘러싼 영국의 고민은 이미 이때 예견된 셈이다. EU를 움직이는 실세는 독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어떻게 유럽을 지배하는가》에서 폴 레버는 40여 년의 외교 경력을 바탕으로 오늘날 독일이 어떻게 EU를 움직이는 최대 파워가 됐는지 들여다본다. 또한 독일이 가진 힘의 배경인 경제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독일 특유의 정치·경제·사회 제도, 독일의 연방제와 EU 구조의 유사성을 분석하면서 EU가 나아갈 방향과 독일의 영향력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망한다. 저자는 1972년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할 당시 외교관으로 활약한 이후 40년 넘게 독일 리더들과 친분을 쌓았고, 독일 주재 영국대사까지 지낸 지역 전문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은 평화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통합을 추진했다. 전쟁에 필수적인 철강과 석탄의 공동 관리를 위해 1951년 유럽철강석탄공동체(ECSC)가 탄생했고, 1957년에는 EEC가 발족하면서 자유무역지대가 창설됐다. 관세동맹을 위해 1967년 출범한 유럽공동체(EC)가 1993년 EU로 전환하면서 상품, 서비스, 자본,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운 단일 시장이 형성됐다. 솅겐조약은 회원국 내 이동을 자유롭게 했다. 그 결과 오늘날 EU는 28개 회원국(영국 포함)에 인구 5억1000만 명, 국민총소득(GNI) 21조6000억달러의 세계 최대 경제권이 됐다.
독일은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EU를 움직이는 최대 영향력을 갖게 됐을까. 1961년 영국이 EEC 가입을 신청했을 때만 해도 허용 여부와 허용 조건을 결정한 것은 프랑스였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영국의 가입에 반대하자 다른 5개 회원국은 아무런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EEC 발족 이후 40년 가까이 유럽을 쌍끌이하던 프랑스와 독일의 균형은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깨졌다. 독일은 2000만 명의 국민을 더 얻었고, 영토도 3분의 1이 늘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후 이어진 유럽 나라들의 재정 위기였다. 위기 해결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독일은 유럽의 중추 세력으로 떠올랐다. 2015년 그리스 국가 부채위기 때 EU의 대응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총선에 승리한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EU 긴급구제 조건의 상당한 수정을 요구하자 메르켈 총리는 더 엄격한 긴축정책을 제시했다. 결과는 그리스의 항복이었다.
EU에서 독일의 목소리가 이렇게 커진 것은 독일이 EU 분담금을 가장 많이 내기도 하지만 EU조약과 안정·성장협약의 기본정신을 가장 잘 지키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안정·성장협약은 유럽통화동맹 회원국들이 매년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3%, 정부 부채는 60% 이하로 유지하도록 한 협약이다. 위기 해결 과정에서 독일은 이 원칙에 충실했고, 결과적으로 EU 전체의 불안을 막아냈다.
저자는 또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 발전, 양호한 재정 상태, 높은 수준의 사회연대 등 탄탄한 경제가 힘의 원천이라고 분석한다. 아울러 연방만큼이나 지역을 중시하는 시스템, 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집중한 점, 프랑스 헝가리 미국 등과의 돈독한 관계 구축 등을 통해 EU를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현재의 추세로 보면 앞으로 20년 동안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은 독일이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로 특징 지어질 것”이라며 유로존에 더 많은 규율이 생기고 회원국도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EU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저강도 군사작전이 늘어나고 상설 EU 군사령부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했다. 2017년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의 제반 상황을 생생하게 분석, 정리하고 있어서 유럽의 심장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