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EU] 민주주의 확산 막으려…"정부 욕하면 벌금" 인터넷 차단 나선 러시아

입력 2019-03-20 06:20
수정 2019-05-04 00:00
인터넷 통한 ‘전자 민주주의’에 압박 느꼈나
푸틴, 가짜뉴스 및 국가 모욕 금지법 서명
TV 신뢰도 급감…여론 통로된 인터넷 규제나서
“옛 소련, 북한과 같다…러 고립될 것” 비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인터넷상에서 가짜뉴스 유포를 금지하는 법안과 국가 모욕 콘텐츠를 차단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앞서 상·하원 심의를 통과한 이들 법안은 공표를 거쳐 조만간 발효될 예정입니다. 2000년 집권 당시 TV를 독점했던 데 이어 인터넷을 장악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러시아 시민들은 모스크바를 비롯해 전역에서 반대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푸틴이 서명한 가짜뉴스 금지 법안은 인터넷에서 국민의 생명, 자산, 사회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허위 정보의 확산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러시아 검찰이 가짜뉴스를 발견하면 매스컴 감독청에 이를 통보하고, 인터넷 매체에 정보 삭제를 요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가 확산되어 중대한 피해를 입힐 경우, 정보를 유통한 개인은 최대 40만루블(약 700만원), 법인은 150만루블(약 2600만원)의 과태료를 물도록 했습니다. 공공기관 모욕 금지 법안은 사회, 정부 기관, 국가 상징 등을 모욕하는 콘텐츠를 차단하는 내용입니다.

러시아 시민은 물론이고 외신들도 잇따라 푸틴의 인터넷 ‘중앙 집중화’ 법안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이코노미스트는 푸틴이 2000년 대통령 자리에 오를 때 TV에 대한 정부 독점을 강화했다는 점을 근거로 러시아 정부가 법안 제정으로 인터넷 장악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푸틴이 집권할 당시 TV는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미디어였습니다. 과거 소련이 붕괴했을 때 모든 TV 채널에 클래식 음악이나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반복해서 나왔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여론 확산 통로로 인터넷이 많이 활용되면서 TV를 장악했을 때처럼 인터넷을 독점하려 한다는 분석입니다. 러시아 정치 전문가들은 “러시아 정치는 TV(프로파간다)와 냉장고(경제) 사이의 전쟁”이라고 묘사합니다. 선전 도구와 경제 주도권을 차지하는 쪽이 정권을 잡는다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 정부가 가장 신뢰했던 선전 도구(TV)가 힘을 잃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론조사업체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TV를 신뢰하는 러시아인은 2009년 대비 최근 30%포인트 떨어졌습니다. 반면 인터넷 기반의 정보를 신뢰하는 사람은 3배 늘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18~24세 젊은 층이 가장 많습니다. 푸틴 행정부의 집권이 사실상 독재처럼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에서 인터넷은 민주주의 가치를 확산하는 도구로 여겨집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전자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네티즌들은 목소리를 뜻하는 ‘골로스’라는 사이트에 러시아 정치인의 불법 선거 의혹을 기록하면서 정계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튜브는 미디어 독점을 깨는 주요 채널입니다. 유리 두드 인터넷 저널리스트는 유튜브로 정치인이나 유명인사 등을 인터뷰하고 평소 TV에서 접할 수 없었던 관점을 제시합니다. 영상 조회수가 1000만~2000만건에 달할 때도 많습니다. 야당 지도자 알렉시스 나발니는 각각 250만명, 450만명이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을 두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가 저녁에 진행하는 뉴스쇼는 하루에 300만~400만명이 라이브로 시정할 정도로 인기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 정부가 인터넷을 TV처럼 만들고 싶어한다”며 “인터넷 공급 업체 등 물리적 인프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러시아 시민과 야권 등도 푸틴 대통령의 법안 추진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법안의 내용이 모호해 남용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러시아 당국이 반정부 성향 언론을 탄압할 수 있다는 우려때문입니다. 유리 드지블라제 민주주의발전및인권센터 소장은 “옛 소련의 체제 훼손 활동 금지법과 반소련 선전 금지법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러시아 시민들은 “정부의 규제가 러시아 인터넷망을 세계에서 고립시켜 북한 인터넷처럼 운영할 것”이라며 시위에 나섰습니다. 보안이 좋은 메신저로 유명한 텔레그램도 “인터넷 중앙 집중화 법안은 해외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 접속을 차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여러차례 텔레그램 전면 차단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죠.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