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美·北 협상, 잔머리와 신뢰 사이

입력 2019-03-12 18:18
"'싱가포르 성공' 환상에 빠진 北
'신뢰 붕괴'에 박차고 일어선 美
그게 하노이 회담 맨손 결렬 과정

도전적인 협상태도는 좋지만
거짓말과 잔머리는 실패 지름길"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국제협상학 >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병약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스탈린의 건강이 해외여행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주장 때문에 루스벨트는 몰타섬을 거쳐 다시 비행기를 타고 크림반도로 가서 거친 해안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몇 시간 시달린 뒤 얄타에 도착했다. 그가 두 달 후인 4월에 서거했으니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긴 여정으로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프기는커녕 건장한 시베리아의 곰같이 나타난 스탈린은 협상을 끌며 지칠 대로 지친 루스벨트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얻어냈다. 이같이 공산주의자들은 상대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북한에 지난해 6월의 싱가포르 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지난달의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도 장소부터 환상적이었다. 미국 대통령은 20시간을 비행하며 시차에 시달려야 했는데, 북한 지도자는 남행열차를 타고 유유히 내려가면 됐다. 스탈린이 병약한 루스벨트를 물고 늘어졌듯이, 마이클 코언 변호사의 의회 증언으로 궁지에 몰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어지간한 카드를 던진다면 덥석 물 것 같았다. 평양으로선 ‘대박’을 예감했을 것이다.

이 같은 성공의 환상에 빠져 과신한 북한이 ‘영변 카드’를 던졌는데 미국이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실패한 하노이 회담에서는 최고경영자(CEO)가 배울 비즈니스 협상 전략이 있다.

우선, 평양의 지도자처럼 성공의 환상에 빠져 협상 상황을 과신해선 안 된다. 한 번 성공한 협상자가 다음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협상 상황과 상대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상황을 말한다.

이의 좋은 예가 카를로스 곤 전 닛산자동차 회장의 몰락이다. 1999년 르노가 닛산의 지분을 인수한 뒤 곤 회장은 ‘코스트-킬러(cost killer)’로서 무자비하게 구조조정을 했다. 성공의 환상에 빠진 그는 2017년부터 르노·닛산·미쓰비시 삼각제휴 협상을 하며 닛산이 과거처럼 따라올 것이라고 과신했다. 과거엔 닛산이 도산위기에 처했지만 이제는 경영흑자로 돌아섰다. 더욱이 닛산은 르노에 경영권을 장악당할 우려가 있는 삼각제휴가 싫었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곤은 쇠고랑을 차는 신세가 됐다. CEO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변하는 비즈니스 상황과 상대에 맞는 새로운 협상 전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둘째, CEO는 아무리 시간과 돈을 투자한 협상이라도 뭔가 잘못돼 간다고 판단하면 과감히 탈출해야 한다. 맥스 바저만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미국 CEO들이 제일 많이 범하는 실수는 잘못된 협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국내 정치 위기 탈출용으로 적당히 정치적 쇼 같은 합의를 할 것을 우려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1938년 뮌헨 회담에서 히틀러에게 농락당한 영국 총리의 이름을 딴 ‘도널드 체임벌린’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길 뻔했다. 요즘 한창 트럼프를 괴롭히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조차 ‘노딜’만은 칭찬한다.

셋째, CEO는 ‘톱다운 협상’을 너무 과신해선 안 된다. 트럼프는 이번에 1987년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톱다운식 역사적 핵감축 협상을 벤치마킹해보려 했다. 사실 그때는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상이 실무합의를 거의 해놓고 나서 두 나라 정상이 만났다. 그런데 이번엔 실무협의 결과가 맨손인데 정상회담에서 통 큰 담판을 해보려 했다. CEO는 중요한 협상을 할 때 톱다운 방식으로 큰 그림을 그려주고 나머지는 실무협의에 맡기는 ‘보텀 업(bottom up) 방식’을 병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통 큰 협상에서 신뢰의 중요성이다. 회고록을 보면 1987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만나자마자 “신뢰할 만한 상대”라고 서로 교감했다고 한다. 세계의 주목을 받던 인수합병(M&A) 빅딜이 깨지는 것은 많은 경우 CEO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노이 회담의 가장 큰 손실은 워싱턴과 평양 사이의 신뢰에 금이 간 것이다. 미국의 협상 역사를 보면 상대가 거칠고 도전적으로 나오는 것은 받아준다. 하지만 하노이에서처럼 거짓말을 하고 잔머리를 굴리면 ‘아메리칸’은 정말 못 참는다. 안타깝게도 트럼프식 빅딜이 실패한 북한 비핵화 협상은 앞으로 정처 없이 표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