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서 다음달 총선을 앞두고 중도우파 연립정부로 구성된 내각이 지난 8일 총사퇴를 했습니다. 정부가 추진해온 보건복지개혁 법안(SOTE)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자 입법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유하 시필레 총리를 포함, 각료 전원이 물러난 것입니다.
시필레 내각은 인구 고령화에 따른 과도한 복지 예산을 줄이는 대신 의료서비스를 효율화 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놨지만 의회와 지방정부에 부딪쳐 결국 좌절된 것인데요.
핀란드는 12년 전부터 복지 개혁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지 예산 감축에 반대하는 여론에 부딪쳐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시필레 내각도 2029년까지 복지 분야 공공지출을 30억유로(약 3조8000억원) 줄이겠다고 했지만 다시 무산됐습니다. 결국 현 정부에서도 마치지 못하고 개혁은 또다시 다음 정권의 몫으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정보기술(IT) 기업인 출신인 시필레 총리는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할 당시만 해도 노키아의 몰락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핀란드의 개혁을 이끌 적임자로 각광 받았습니다. 그는 IT 연구원으로 출발해 소프트웨어, 이동통신, 바이오 에너지 관련 벤처기업을 창업해 백만장자까지 된 인물이지요.
기업인 출신인 만큼 일자리 20만 개 창출, 사회보장비용 감축 등 친(親)시장적인 공약을 내걸며 “핀란드가 제2의 그리스가 될 수는 없다”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취임 후 시작한 복지 개혁은 쉽지 않았습니다. 취임 당시 0.1%에 불과했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6%를 넘어설 정도로 호전됐고, 실업률도 꾸준히 낮아지고 있지만 복지 문제에서는 유독 벽에 부딪혀야 했죠.
시필레 총리의 복지개혁 법안은 현재 295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 중인 복지제도를 18개 행정기관이 통합·관리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550만 인구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복잡한 복지 행정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죠.
또 환자들이 공공 의료 뿐 아니라 민간 의료까지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했습니다. 복지를 정부의 역할에서 민간으로 확대하는 방향이죠.
그러나 각계각층의 반발은 거셌습니다. 복지 운영 권한을 뺏기게 되는 지자체는 물론이고 야당, 심지어 연정 내부를 설득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시필레 총리의 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은 “선택의 자유를 확대한다는 미명 하에 의료 서비스마저 고수익을 쫓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의료 민영화에 대한 우려인 것이죠. 게다가 핀란드 헌법에서는 복지제도의 행정권한이 공공기관에만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위헌 시비까지 나왔습니다.
시필레 총리는 개혁을 추진하면서 반발이 일자 “전임 정부들은 개혁 과정에서 굴복했지만 핀란드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시필라 내각도 이번 의회에서 개혁안 입법을 관철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시필레 총리의 또 다른 복지 개혁으로는 기본소득 보장 제도도 꼽을 수 있는데요. 이 또한 실업자들의 고용을 늘리는 데 효과가 없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시범사업이 중단된 상황입니다.
앞서 핀란드 정부는 2017년 1월 25~58세 실업자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기존 공적부조 제도와 별도로 매달 560유로(약 72만원)씩 지급하는 복지 실험을 2년 간 했습니다.
기본소득제는 언뜻 좌파 정책처럼 보이지만 ‘복지제도 축소와 고용 유연화’를 목적으로 핀란드 우파 정권이 추진했던 것이죠. 기존의 복잡한 복지제도를 폐지하고 실업자에게 차라리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단순화하면 수혜자 선별 등에 드는 행정비용을 줄이고 근로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핀란드 사회보장연구원은 기본소득제가 실업자들의 고용을 늘리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결론을 발표하면서 이 실험은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연구팀은 보고서에서 “실험 결과 기본소득 수혜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데 있어 비교 대상인 다른 그룹에 비해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기본소득 수령자들이 기존의 사회보험 수령자들과 비교해 스트레스를 덜 받고 장래에 대해 높은 자신감을 갖는 등 ‘웰빙’ 측면에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설명했죠.
시필레 정부는 당초 지난해 말까지 2년간 시험해본 뒤 적용 대상을 확대할 방침이었지만 결론이 이렇게 나오면서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구직 활동에 따라 실업수당을 지급하거나, 수당 지급 기간을 줄이는 등의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필레 총리는 내각에선 사퇴했지만 다음달 총선에서 재집권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개혁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