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반도체 공장 '송전탑 갈등' 극적 타결
안성 주민, 송전선 완전 지중화 요구 접고 중재안 전격 수용
삼성은 750억 추가 부담…2023년부터 전력 추가공급 받아
중재 이끈 정치권도 '한몫'…사회적 갈등 푸는 모범 사례로
[ 고재연/오상헌 기자 ] “더 이상의 중재안은 없습니다.”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둘러싼 기업(한국전력·삼성전자)과 지역 주민 간 갈등을 중재한 김학용 자유한국당 국회의원(경기 안성)은 지난 1일 한전 담당자에게 서류를 건네며 “마지막 중재안”이라고 거듭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중재안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상황에서 나온 마지막 제안이란 의미였다. 김 의원이 내놓은 중재안은 주민들이 지중화를 요구한 산간지역 1.5㎞ 구간에 대해 △지상 송전탑과 지하 터널을 동시에 건설해 △공사기간이 짧은 송전탑이 2023년 건립되면 송출을 시작하되 △2025년 터널이 완공되면 선로를 터널에 넣고 송전탑은 철거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5년 만에 이뤄진 ‘대타협’
김 의원의 중재안은 결국 “대의를 위해 지역 주민과 사업자가 조금씩 양보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중재안을 받아들이는 건 이해당사자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전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산간지역에 송전선을 지중화한 선례를 남기는 것이 부담이었다. 삼성은 생각지도 못한 터널 건설 및 송전탑 철거비 750억원을 ‘사용자 부담원칙’에 따라 물어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주민들은 ‘전 구간 지중화’ 요구를 물리고, 송전탑 완공 시점(2023년 2월)부터 터널 완공 시점(2025년 2월)까지 2년 동안 송전탑을 허용해야 하는 게 싫었다.
협상의 물꼬를 튼 건 삼성이었다. “전력만 빨리 공급된다면 추가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입장을 건넨 것. 24시간 가동하는 반도체 공장은 전력 공급이 잠깐만 중단돼도 원재료인 웨이퍼를 전량 폐기해야 한다. 30분만 중단돼도 수백억원을 날린다. 전력 공급이 불안하면 공장 가동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력 공급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대가로 750억원가량을 충분히 부담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성이 전향적인 자세로 중재안을 수용하자 한전도 뜻을 같이했다. 산간지역 지중화 선례를 남기더라도 한국의 대표 공기업으로서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한전과 삼성이 기존 입장에서 한발짝 물러났다는 소식에 주민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전이 송전탑 건설로 피해를 보는 주민들에게 보상을 하고, 임시로 건설한 송전탑을 2025년 12월까지 철거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주민들을 ‘중재안 수용’으로 돌려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삼성은 안성시의 요청에 따라 지역사회 지원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5년간 이어진 송전탑 갈등은 이렇게 풀렸다.
갈등 해결 새로운 모델 되나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은 향후 증설을 고려해 반도체 라인 4개를 깔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됐다. 2017년 가동한 1라인에 이어 이르면 2020년부터 2라인이 단계별로 가동에 들어간다. 서안성~고덕 송전선로 건설이 표류한 탓에 2라인 가동 초기에는 빠듯하게 전력운용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2023년 2월 송전선로가 완공되면 전력 공급량이 600㎿에서 2000㎿로 대폭 확대된다. 2라인은 물론 3~4라인을 건립할 때도 전력 공급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30조원이 투입되는 반도체 1개 라인이 건립되면 직·간접적으로 44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경제계는 이번 협약이 사회적 갈등 해결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국회의 중재로 사업자와 지역 주민이 조금씩 양보한 끝에 ‘대타협’을 이뤄냈다는 점에서다. 중재자 부재와 지역 주민의 극렬한 반발 등에 밀려 기업이 투자를 포기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LG화학이 2017년 전남 나주시에 추진한 친환경 가소제 공장 증설 프로젝트가 그랬다. LG는 투자와 일자리를 약속했지만, ‘유해물질이 공기중에 퍼질 수 있다’는 주민 반발에 부딪혀 철회했다.
김 의원은 “삼성이 송전탑 때문에 반도체 투자시점을 놓친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이라며 “국익을 생각해 지역 주민과 기업들이 조금씩 양보했다는 점에서 갈등 조정의 모범 사례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다른 의견도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합의 도출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비효율적인 결과를 낳은 측면이 있다”며 “2년 쓰고 버릴 송전탑을 짓는 데 수백억원을 들이고, 사람이 살지 않은 산간지역 송전선도 땅에 묻는 건 기업이 과도하게 양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재연/오상헌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