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면·요괴라면…'대박'은 틈새서 나온다

입력 2019-03-08 17:46
소득 3만弗 시대…소비 트렌드가 바뀐다
(3·끝) 틈새가 주류를 흔들다


[ 김보라 기자 ] 라면시장은 식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진입장벽이 높다. 30년 넘게 1위 기업이 버티고 있는 데다 상위 4개사의 시장 점유율이 90%를 넘는다. 이 시장에서 지난해 돌풍을 일으킨 라면이 두 개 있다. ‘랍면’과 ‘요괴라면’이다.

랍면은 1년여 만에 약 300만 개가 팔렸다. 요괴라면도 월 6만~7만 개씩 팔린다. 두 제품 모두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랍면을 내놓은 회사 로사퍼시픽과 요괴라면을 선보인 회사 옥토끼프로젝트에는 닮은 점이 있다. 식품회사가 아닌 데다 자체 공장이 없으며 대형마트와 편의점에 입점하지 않고 온라인 유통으로만 이 같은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랍면은 프리미엄 슈퍼인 SSG푸드마켓과 현대백화점에 입점했고, 요괴라면은 소비자 요청으로 이달 말 서울 종로에 여는 자체 편의점 고잉메리에서 판매하기로 했다.

소득 3만달러 시대의 신(新)소비트렌드가 기업의 성공 법칙을 바꿔놓고 있다. 식품뿐 아니라 화장품과 생활용품 등에서 변화하는 소비패턴을 빨리 읽는 ‘작은 기업’들이 기존 대형 유통사와 제조사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꼬리가 몸통을 뒤흔들고, 틈새가 주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라진 '메가히트'…랍면·밀스 등 '취향 저격' 상품에 소비자 열광

지난 20년 가까이 식품업계에 도는 말이 있다. “대박이 사라졌다”다. 식품회사 연구원들은 신제품 하나를 개발하려고 1~2년씩 연구한다. 그렇게 내놓은 제품이 전부 ‘국민 라면’이 되고 ‘국민 과자’가 되는 때가 있었다. 2000년 이전까지의 얘기다. 지금은 공장에서 아무리 잘 만들어도, 대형마트와 온라인에서 할인행사를 해도 잘 안 팔린다. 수명도 짧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먹거리가 풍족해진 데다 다양한 선택지로 인한 ‘취향 소비’가 이뤄지고 있어서다.

‘아이디어=돈’…미들맨 몸값 높인 소비자

신종 히트상품은 소비자의 취향 소비를 파고든 기업들에서 나왔다. ‘랍면’은 뷰티 전문기업으로 시작한 회사 로사퍼시픽이 2017년 내놓은 제품이다. 이 회사의 식품 브랜드 ‘팔킨’은 ‘하얀짜장’ ‘치스타(치즈파스타)’ ‘갈비의 기사(갈비소스 라면)’ ‘짜뽕(짬짜면)’ 등을 만든다. 판매 가격이 라면 1봉지에 2000~3000원으로 기존 라면의 평균 가격보다 두 배가량 비싸지만 불티나게 팔린다. 무엇을 만들지는 팔킨의 기획팀이 결정하고, 제조는 중소 라면제조회사 새롬식품이 한다.

이정교 로사퍼시픽 대표는 “꼭 필요한 제품, 재미있는 제품이면서 지금까지 시장에 없던 제품을 선보여 소비자의 공감을 얻는 방식으로 성장해왔다”며 “신제품 개발은 ‘발명’이 아니라 소비자를 ‘관찰’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팔킨이 만든 제품 중 ‘라면국물 티백’은 6개월 만에 100만 개가 팔렸다. 출시 직후 소비자에게서 “상상이 현실이 됐다”거나 “해외여행 필수품이다” 등의 호응을 얻었다. 이 회사는 20대 여성을 겨냥한 ‘6초향수 베리식스’, 누구나 쓸 수 있는 치아미백기 ‘닥터스마일’ 등으로 티몬에서 4년 연속 매출 상위 1% 기업에 들기도 했다.

편의점 진출하는 ‘요괴라면’

온라인에서의 성과는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팔킨의 제품들은 소비자 구매 요청이 쇄도해 편의점과 백화점 등 MD들이 ‘모시고 싶은 제품’ 1순위에 들었다. 랍면 등의 라면은 현재 청담SSG와 PK마켓, 신세계면세점과 현대백화점 등에만 입점해 있다.

유명 디자이너에서 무역회사 대표, 중견 외식업체 대표 등 30~40대 미식가 6명이 모여 만든 ‘요괴라면’도 곧 자체 편의점 진출을 앞두고 있다. 10년 넘게 맛집 탐방을 같이하던 친구들이 ‘옥토끼프로젝트’라는 프로젝트 회사를 차리고 ‘봉골레맛 요괴라면’ ‘국물떡볶이 요괴라면’ 등으로 대기업 라면에 도전장을 낸 지 1년여 만이다. 이들은 마케팅은 개인 소셜미디어(SNS)로 했고, 판매도 회사 홈페이지에서만 해왔다. 박리안 옥토끼프로젝트 부대표는 “이달 말께 서울 종로에 ‘고잉메리’라는 이름의 편의점을 열어 온라인에서의 실험을 오프라인으로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원하고, 우리가 원하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소비자 취향을 공략해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통·식품회사의 ‘권력 이동’ 가속화

소비 트렌드의 변화는 유통·식품업계 ‘권력의 분산’으로도 해석된다. 몸집이 작고 기획력이 뛰어난 기업도 언제든 선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중소·중견 제조업체의 네트워크가 핵심이다. 분말형 대용식 ‘밀스’로 시작한 인테이크는 25개 중소 협력사와 함께 일하고 있다. 공장 1개도 없이 9개 브랜드, 300여 개 제품을 내놓은 비결은 네트워크에 있다. 지난해 매출 1200억원 이상을 달성한 블랭크코퍼레이션은 바디럽, 소소생활, 블랙몬스터 등 라이프 스타일 관련 20개 브랜드 제품을 생산판매하면서 70여 개 제조사 및 유통사와 협력한다.

전통 있는 제조사도 기획자의 브랜딩을 거쳐 재탄생하는 사례도 생겼다. 식품 기획과 브랜딩 전문 회사인 양유는 30년 된 떡집 영의정과 협력생산하는 ‘청년떡집’을 만든 데 이어 70년 넘은 만두명가 취영루와 손잡고 온라인 냉동만두 브랜드인 ‘만두몬스터’를 내놨다. 김학균 성균관대 마케팅학과 교수는 “100만 명의 소비자가 100만 개의 취향을 갖고 있다고 할 정도인 시대가 됐다”며 “제조 중심보다는 기획 중심의 회사에 많은 기회가 열려 있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새로운 경험을 주는 기업에 소비자들이 점점 더 열광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