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심비' 좇는 소비자들…한송이 3만원짜리 포도 없어서 못팔아

입력 2019-03-07 17:47
수정 2019-03-08 07:44
소득 3만弗 시대…소비 트렌드가 바뀐다
(2) 가격보다 가치가 우선


[ 안재광 기자 ]
지난달 23일 오전 9시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6층에 긴 줄이 생겼다. 건담 프라모델 신제품 ‘하이레솔루션 모델 윙 건담’을 사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이다. 30대 안팎 남성이 대부분이다. 오전 10시30분 건담 판매점인 건담베이스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16만2000원짜리 이 로봇 장난감을 사기 위해 서울뿐 아니라 기차를 타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었다. 충북 청주에서 왔다는 30대 직장인은 “건담 신제품은 출시 직후에 매진되는 일이 많은 데다 행사 때 할인폭이 커 출시 첫날 사는 게 좋다”며 “한 번 매장을 방문하면 최소 50만원 이상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건담베이스는 오는 23일 롯데백화점 본점 영플라자에도 매장을 열 예정이다.

백화점 리빙관 매출 급증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의 큰 소비 흐름 중 하나가 ‘가치소비’다. 수입과 관계없이 가치가 있다고 믿는 물건, 브랜드에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 소비 행태다. ‘가성비’(가격 대비 품질)를 넘어,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가 소비 시장의 키워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취미 분야뿐 아니라 인테리어와 식품 등에서 이 같은 가치소비의 흐름이 두드러진다.

백화점의 리빙관 확장은 이런 추세를 반영한다. 리빙관은 가전·가구·인테리어 용품을 판매하는 곳을 말한다. 백화점 리빙관 매출 비중은 2015년만 해도 9.9% 수준이었다. 작년에는 이 비율이 12%로 뛰었다. 지난 1~2월 롯데백화점의 리빙관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약 30% 급증했다. 전세나 월세로 살더라도 ‘집 꾸미기’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람이 많아진 영향이다. 특히 20~30대 젊은 소비자가 크게 늘었다. 그러자 백화점들의 ‘대우’가 달라졌다.

롯데백화점은 본점 시설 공사를 하면서 리빙관부터 열었다. 1월 24일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이 몰렸다. 오픈 한 달 만에 1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인테리어 소품으로 많이 쓰이는 도자기 인형인 야드로 매장에선 1000만원짜리 상품도 팔려나갔다.

현대백화점은 작년 7월 무역센터점에 ‘럭셔리 리빙관’을 열었다. 수백만원 하는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카시나, 프랑스의 리네로제 등을 선보였다. 럭셔리 리빙관을 연 뒤 무역센터점 가구 매출은 매월 50% 이상 뛰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윌리엄스소노마란 미국 기업의 인테리어 관련 상품 판권을 2017년 통째로 들여오기도 했다. 윌리엄스소노마는 지난해 분기당 30~40%대의 높은 매출 증가율을 보였다. 올클레드의 냄비세트는 가격이 100만원을 넘는데도 월평균 60%씩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

식품은 가격보다 취향 점점 중요

식품과 식재료도 프리미엄화와 함께 가치소비 바람이 거세다. ‘샤인머스켓 열풍’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마트는 작년 8월부터 올 2월까지 망고향이 나고 당도가 높은 청포도 샤인머스켓을 팔았다. 가격이 일반 포도 품종 대비 50% 이상 비쌌다. 그런데도 수요가 몰렸다. 이 기간 이마트의 샤인머스켓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약 12배 증가했다. 이마트 용산점 등 일부 매장에선 재고가 달려 일부 소비자가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새벽배송업체 헬로네이처도 지난해 샤인머스켓 판매로 ‘대박’을 터뜨렸다. 한 송이에 3만원 하는 국내산 샤인머스켓을 하루 300~400개씩 팔았다.

소비자들은 품질만 따지지 않는다. 이마트의 고급슈퍼인 PK마켓에서 동물복지 인증 삼겹살이 잘 팔리는 것은 소비자들이 ‘사육 환경’도 중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격이 일반 삼겹살 대비 80%나 높지만, 작년 분기당 매출이 60~70%씩 급증했다. 재구매율은 70%에 이른다. 이마트 관계자는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동물 복지에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아진 영향”이라고 말했다.

유통업체들은 이 같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별도의 고급 슈퍼를 열기도 했다. 롯데슈퍼가 가장 공격적이다. 2016년 롯데프리미엄마켓을 연 뒤 작년까지 10곳으로 늘렸다. 스페인 흑돼지, 스위스 생수, 대만 과자 등 일반 슈퍼에는 잘 없는 ‘취향 저격 상품’을 대거 갖췄다. 롯데프리미엄마켓은 기존 롯데슈퍼에 비해 1인당 매출은 75%, 방문객 수는 86.6% 많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