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의 논점과 관점] 제약·바이오업계의 골목대장들

입력 2019-03-06 00:13
김태철 논설위원


[ 김태철 기자 ] 1010억달러(약 113조7765억원). 올 들어 지난 2월까지 발표된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 간 인수합병(M&A) 규모다. 작년 상반기 관련 업계 전체 M&A(1154억달러, 시장조사기관 EP 집계) 금액의 87.5%에 달한다.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생존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신약 개발 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잇따라 ‘빅딜(big deal)’에 뛰어들고 있다.

요동치는 글로벌 업계 판도

새해 벽두부터 M&A 경쟁에 불을 지핀 것은 지난 1월 3일 BMS의 희귀난치질환 치료제 개발업체인 세엘진 인수 발표였다. 인수 예정금액은 제약업계 역대 M&A 중 두 번째로 많은 740억달러(약 83조3610억원)다. 세계 13위(매출 기준) 제약사 BMS가 17위 세엘진 인수를 마무리하면 노바티스에 이어 세계 6위로 올라선다.

세계 14위 일라이릴리는 1월 말 항암제 개발 바이오업체인 록소온콜로지를 80억달러(약 9조32억원)에 사들였고, 세계 2위 로슈는 지난달 초 유전자치료제 개발 업체인 스파크세러퓨틱스를 48억달러(약 5조4072억원)에 인수했다.

일본 제약사들의 ‘몸집 불리기’도 두드러지고 있다. 세계 19위 제약사인 다케다는 작년 12월 620억달러(약 69조8430억원)를 들여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업체인 샤이어(세계 28위)를 인수했다. 세계 제약업계 M&A 역대 3위이자 일본 기업 M&A 사상 최대 규모다. 다케다는 샤이어 인수로 단번에 세계 8위 제약사로 도약했다.

국내 제약시장은 M&A 광풍이 불고 있는 해외 시장과 달리 조용하다.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인 한국콜마가 지난해 CJ제일제당으로부터 CJ헬스케어를 인수한 것을 제외하곤 최근 제약사 간 M&A를 찾아볼 수 없다. 다케다 등 일본 경쟁사들이 국내외 업체 간 M&A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 신약 자체 개발 역량을 키우고 글로벌 판매 거점을 마련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유한양행, 한미약품 등 국내 주요 제약사가 잇따라 신약후보 물질들을 다국적 제약사에 기술수출하고 있지만 M&A 없이는 신약 자체 개발 및 판매를 아우르는 규모의 경제를 이뤄내기에 역부족이다. 연간 매출 1조원대로 국내에선 ‘초우량 제약사’로 불리는 유한양행의 세계 시장 순위는 80위권에 불과하다. 국내 제약사들은 매출 구조도 취약하다. 대형 제약사의 매출 40~50%는 다국적 제약사의 신약 국내 판매 대행이나 음료, 화장품 등 비(非)의약품 판매에서 나온다. 대형화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규모와 영업 구조로는 글로벌 업체 도약은커녕 향후 자체 생존도 장담하기 어렵다.

'M&A 무풍지대' 국내 시장

신약 개발 하나에 최소 수천억원이 드는 상황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국내 업체들도 과감한 M&A를 통한 ‘덩치 키우기’가 시급하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성장사를 살펴봐도 M&A는 빼놓을 수 없다. 세계 1위 화이자는 호스피라, 워너램버트 등 43개 대형 제약사의 합병으로 이뤄진 회사다. 세계 4위 머크와 5위 노바티스도 각각 31개와 29개 대형 제약사가 합병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국내 제약사들은 안정적인 내수시장에서 ‘나눠먹기’에 익숙한 탓에 경영권 상실이 두려운 M&A에 여전히 소극적이다. 이런 상황이 고착화된다면 신약기술 수출이 많아져도 글로벌 기업에 로열티를 받고 원재료(신약후보 물질)를 공급하는 하청업체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국내 제약사들이 ‘골목대장’에 안주할수록 글로벌 제약사의 꿈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