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혁 前 고합 회장 "독립 위해 싸웠던 어머니가 강조한 건 '화해와 관용'"

입력 2019-03-01 18:30
3·1절 100주년

"이념 치우친 국론 분열 경계해야"

비폭력·평화 지향 '만세 시위', 세계사에 유례없는 독립운동
부친도 항일언론인으로 활동



[ 김보형 기자 ] “일본은 어제까지 가장 큰 원수였지만, 오늘부터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장치혁 전 고합 회장(87·사진)은 귀를 의심했다. 일제가 패망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장 전 회장의 모친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숙자 여사는 평안북도 영변 고향집 장롱 바닥에 감춰뒀던 태극기를 아들에게 보여주며 이같이 말했다. 장 전 회장은 “1919년 3·1운동 당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고 회고했다. 김 여사는 1921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던 대한애국부인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체포될 당시 그는 임신 7개월이었다. 김 여사는 광복 후 소련군에 쫓기던 일본인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민족사학자이자 항일언론인으로 활동했던 부친 장도빈 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다. 장 선생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에서 항일 논설을 쓰다가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블라디보스토크 권업신문 주필로서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한국의 해방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친일파 처벌을 추진할 때 오히려 ‘관용’을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도지사를 지낸 김대우 등이 법정에 서자 “그들의 행정 경험을 신생 조국을 위해 써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부는 1990년 장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1966년 고려합섬을 설립해 1990년대 중·후반 재계 17위 기업을 일군 장 전 회장은 지난달 2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1운동은 비폭력과 평화를 기치로 침략자(일본)를 설득한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독립운동”이라며 “국가 내부적 문제를 해결할 때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할 때도 ‘분열 대신 화합’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건국 시점에 관한 진보·보수 진영의 갈등과 위안부 합의 문제 등으로 경색된 한·일 관계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독립유공자와 친일파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3·1운동에 참여하고도 1940년대 일제의 태평양전쟁 때 친일에 가담한 독립인사가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3·1운동 징후를 알면서도 윗선에 보고하지 않아 옷을 벗은 한국인 고등계 형사도 있고요.”

그는 “흑백논리를 갖고 싸우는 동안 인간과 사회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장 전 회장은 대한민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국민이 서로 화합하고 다른 나라와 협력한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고려합섬을 설립했을 때 일본 미쓰이석유화학과 이토추상사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포스코도 신일본제철의 기술 전수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가 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100여 년 전 지도에서 사라졌던 망국(亡國)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념에 치우친 과거 청산 단계를 넘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 전 회장은 “신문물이 쏟아지던 구한말 국제적인 변화엔 눈을 감은 채 당파싸움만 하다가 나라를 빼앗긴 것”이라고 했다.

“일제의 잔악한 식민통치를 옹호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