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핵담판' 결렬 쟁점은
이용호, 심야회견서 "민생관련 제재 풀자는 것" 주장
최선희 "역사상 없던 제안…美 기회 놓쳤다"
[ 박동휘/김채연 기자 ]
베트남 하노이 시간으로 1일 0시13분,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차분한 어조로 해외 취재진 앞에서 입을 뗐다. “조·미(북·미) 양국의 수뇌분들은 이번에 훌륭한 인내력과 자제력을 가지고 이틀간에 걸쳐서 진지한 회담을 진행했다.” 심야 긴급공지 직후 일일이 신분증을 확인하며 한국을 포함해 외신기자들을 불러모은 자리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2차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호텔에서 두문불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용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북한은) 단계적 해결 원칙에 따라 현실적인 제안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오기 힘든 기회를 놓쳤다.” 전날 “북한이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로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약 10시간 만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北, 심야 긴급 기자회견 자청
북한이 급박하게 알리려 했던 건 크게 두 가지다. 이용호와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기자회견에서 영변 핵시설의 값어치가 얼마나 큰지, 자신들이 원하는 제재 완화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여러 차례 강변했다.
이용호는 대북제재와 관련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가 아니고 일부 해제, 구체적으로는 유엔 제재 결의 11건 가운데 2016~2017년 채택된 5건, 그중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12일 1차 미·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단계적 해결 원칙에 따른 “현실적 제안”이라는 게 이용호의 주장이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전면적인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며 회담 결렬의 원인으로 북측의 ‘과도한 청구서’를 지목했다. 그는 워싱턴DC로 귀환한 뒤에도 북한의 ‘심야 회견’을 반박했다. “북한이 원하는 제재 완화와 미국이 원하는 북한의 비핵화 사이에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노이에서 필리핀으로 넘어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역시 “북한이 일부가 아니라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북이 벌이는 설전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식의 차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유엔 제재 중 북한이 해제를 요구한 5개 항은 북한의 ‘돈줄’을 죄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막고 김정은을 협상장으로 불러낸 핵심으로 평가된다. 미국 입장에선 5개 항의 해제는 사실상 제재틀의 붕괴나 다름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한이 기자회견을 통해 여론전을 펴고 있는 것이란 추론도 제기된다. ‘인민 생존권’을 내세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구멍을 내려 한다는 얘기다.
확연히 갈린 비핵화 개념
비핵화 조치와 관련해선 양측의 견해차가 훨씬 명확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반박 기자회견에서 이용호는 “우리는 영변 핵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 생산시설을 미국 전문가들의 입회하에 두 나라 기술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영구적으로 완전히 폐기한다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영변 핵시설을 사찰을 통해 ‘원샷’으로 폐기하면 미국도 만족할 것이라는 게 ‘북한의 계산법’이었던 셈이다. 최선희는 기자회견에서 “(지금껏) 역사적으로 하지 않았던 제안을 이번에 했다”고 말했다. 최선희는 이날 저녁 한국 취재진의 질문에 응하기도 했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 동지가 미국의 거래 계산법에 굉장히 의아함을 느끼고 생각이 좀 달라지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외 다른 규모가 큰 핵시설’이란 카드로 맞불을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낡고 노후한 영변 핵시설 말고, 미국의 정보 당국이 이미 파악해 둔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라고 압박했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측이 깜짝 놀라더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전날 결렬 원인을 밝히면서 “김정은이 준비돼 있지 않았던 것 같다”며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와 달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하노이 회담이 미·북 간에 ‘네가 먼저’와 관련한 순서의 문제에 집착하면서 결렬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원점으로 돌아간 북핵 협상
하노이 회담이 보통의 정상회담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점도 결렬 원인으로 꼽힌다. 고위 외교 소식통은 “보통의 정상회담은 실무선에서 합의문을 거의 작성해놓고 정상들은 친교행사 후 최종 서명하는 식이지만 이번엔 달랐다”고 말했다. “사실상 정상 간 협상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협상에 정통한 관계자는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특별대표가 비핵화 부문만 빼놓고 대부분 합의를 이룬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박동휘/하노이=김채연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