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박 3일' 해외출장의 악몽…비행기만 20시간 '공항'장애 오는줄 ㅠㅠ
숙소·맛집 시시콜콜 묻는 상사…'인간 내비' 노릇하느라 스트레스 팍팍
[ 양길성 기자 ]
외국계 컨설팅업체에 다니는 유 과장(38)은 잦은 해외 출장 탓에 체력이 바닥났다. 고객사 요청대로 일정을 짜다 보니 대부분 출장을 사나흘의 짧은 기간에 마쳐서다. 지난주 이탈리아 밀라노로 간 ‘무박 3일’ 출장은 최악으로 기억된다. 사흘 출장 일정에 비행기만 꼬박 20시간 넘게 탔다. 탑승 대기 시간까지 고려하면 비행기와 공항에서만 이틀을 보냈다. 유 과장은 “사흘간 현지에서 업무를 본 시간은 서너 시간뿐이었다”며 “장거리 출장보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단거리 출장이 그나마 체력 부담이 적다”고 했다.
해외출장을 떠난 김과장 이대리는 두 가지 감정이 오간다고 한다. 처음엔 기대가 앞선다. 해외 산업 현장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힐 생각에 맘이 들뜬다. 출장지에서 즐기는 관광과 쇼핑도 소소한 기쁨이다. 그러나 기대는 잠시뿐이다. 빠듯한 일정의 ‘무박 3일’ 출장부터 ‘인간 내비게이션’ 노릇을 하며 상사 수행까지 도맡는 경우도 있다. 로망과 현실이 뒤섞인 해외출장. 이를 겪은 김과장 이대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까다로운 취향에 잠 못든 출장
국내 한 대기업에 다니는 오 과장(38)은 고위 임원과 떠난 첫 출장에 골머리를 앓았다. 기대와 달리 출장 준비에 신경 쓸 것이 많아서였다. 처음엔 비서가 따로 있는 데다 임원 나이도 지긋해 출장 일정이 여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까다로운 취향이 문제였다. 이 임원은 특정 브랜드의 물만 마신다. 초콜릿 쿠키 빵 등 간식도 한 업체 제품을 고집한다. 그가 선호하는 호텔의 층과 향, 침구 종류까지 맞추려다 보니 호텔 예약도 쉽지 않았다. 오 과장은 “물건을 다 챙겼다고 생각했지만 해외에 나가보니 새롭게 찾는 물건이 나타났다”며 “고위 임원과 떠나는 출장이라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입사 이래 가장 힘든 출장이었다”고 털어놨다.
금융 공기업에 다니는 김 과장(36)은 연초 떠난 홍콩 출장 내내 ‘인간 내비게이션’ 노릇을 했다. 함께 출장을 간 정 부장(42)이 식당부터 거래처 위치까지 시시콜콜 물어봤다. 길을 모르거나 조금이라도 헤매면 “젊은 친구가 이렇게 외국에서 헤매서야 되겠느냐”고 핀잔을 줬다. 밤에는 더 곤욕이었다. 다음 날을 위해 자고 싶은데 상사가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홍콩이 처음인 것은 김 과장도 마찬가지였지만 “뭐 좀 알아보라”는 정 부장의 말에 이불 속에서 나와 노트북을 두세 번씩 켜기도 했다.
상사 아내에게 선물할 스카프를 살 때도 김 과장은 매장을 찾아다니며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야 했다. 김 과장은 “직속 상사다 보니 무시하고 잠이 들기 힘들었다”며 “인사발령이 나서 다시는 그 상사와 출장을 가지 않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출장 간 김에…“이것 좀 사다 줘”
수원의 한 제조업체에 다니는 김 대리(30)는 최근 중국 베이징에 3박4일 일정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입사 이후 첫 해외 출장이라 맘이 들떴지만 잠시뿐이었다. 동료들로부터 물건 구매 주문이 쏟아진 것. 동기들은 물론 다른 팀 선배들까지 총 5명이 해외 물건을 사다달라고 했다. “진짜 미안한데…”라며 부탁하는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다. 다짜고짜 “중국 간다며? 샤오미 목베개 좀 사다 줘라”라고 하는 선배도 있었다. 스타벅스 중국 한정판 액세서리부터 마오타이주, 화웨이 휴대용 무선공유기까지 주문 품목도 다양했다. 김 대리는 “결국 출장 마지막날 하루 쉬는데 쇼핑으로 시간을 다 날렸다”며 “목베개가 품절이라서 못 사갔는데 볼멘소리를 들어서 억울했다”고 했다. 그는 “미리 돈을 주지도 않고 후배라고 부탁하는 선배도 있었는데 ‘최악’이었다”고 말했다.
의류업계에 종사하는 정 대리(32)는 출장지 때문에 고민이다. 정 대리의 출장지는 남들이 주로 가는 미국 유럽 등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오지’다. 생산공장이 있는 곳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도 차로 꼬박 8시간을 가야 한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면 서너 번 멀미 나기 일쑤다. 공장 기숙사에서 잠을 잘 땐 도마뱀을 비롯해 과학책에서 볼 법한 온갖 곤충과 조우한다. 2시간 시차에 맞춰 현지시간으로 오전 6시까지 출근하는 것도 곤욕이다. 정 대리는 “출장을 갈 때는 보통 생산공장에서 사고를 친 경우”라며 “공장 업무가 끝나도 퇴근하지 못하고 남아 이메일로 한국 업무를 봐야 하기 때문에 고난의 연속”이라고 토로했다.
출장지에서 이룬 ‘덕업일치’
출장 덕에 ‘덕업일치(광적으로 좋아하는 ‘덕질’과 직업의 일치)’를 이룬 경험도 있다. 요식업계에서 일하는 김 과장(46)은 와인 양조장(와이너리)으로 해외출장을 자주 간다. 주요 출장지는 와인이 많이 나는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지다. 짧게는 3일, 길게는 1주일 다녀온다. 출장을 가면 평소 접하기 힘든 값비싸고 진귀한 와인을 많이 마신다. 와이너리가 수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김 과장에게 좋은 와인을 마음껏 시음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와이너리는 주로 교외에 있기 때문에 오래된 성이나 교회, 유서 깊은 포도밭 등을 구경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김 과장은 “프랑스 브루고뉴에서 포도밭 담벼락에 걸터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와인 ‘라따슈’를 마셨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며 “마치 중세시대 서양의 귀족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