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D 지고 배상 미루다 해외자산 압류당한 정부
이란 다야니家 "730억원 달라"
네덜란드 법원서 가압류 결정
삼성·LG 등 현지 한국기업에 "정부에 줄 돈 압류대상" 통보
이란 다야니家, ISD 배상 못 받자 韓정부 해외자산 가압류
韓정부 'ISD 첫 패소' 뒤 730억 배상 않고, 취소소송 나서자
다야니, 기업이 '정부에 진 빚' 압류하며 압박…'여론戰' 나서
해외 곳곳서 유사소송 우려…정부 어설픈 대응에 기업만 피해
[ 고윤상/안대규/강경민 기자 ]
한국 정부와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서 승소한 이란의 다야니가(家)가 네덜란드에서 한국 정부 자산을 압류하는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정부가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자 강제 법적 조치에 나선 것이다. ISD로 정부 자산이 가압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로테르담지방법원 무역·항만재판부는 최근 다야니가가 제기한 한국 정부에 대한 자산 가압류 청구를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지난달 현지에 있는 한국 기업에 가압류 절차를 안내하는 통보문을 보냈다.
가압류 대상은 현지 한국 기업들이 한국 정부에 진 빚(채무)이다. 재판부는 통보문에서 “한국 정부에 진 빚이 있다면 해당 채무 내역을 밝히고, 한국 정부의 채권은 압류 대상이니 채무를 상환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압류 통보 대상 기업은 삼성 LG KEB하나은행 우리은행 부산항만공사 등 7곳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주무 부처인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국내 기업을 공격해 정부를 괴롭히겠다는 속내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일단은 진행 중인 ISD 취소 소송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韓정부 상대 첫 가압류
이란 가전회사인 엔텍합을 소유한 다야니가는 2010년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수우선협상자로 선정됐으나 자금 조달 계획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으로부터 계약을 해지당했다.
이에 다야니가는 계약 과정에서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며 ISD를 제기해 지난해 “한국 정부가 730억원을 돌려주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정부는 영국 고등법원에 이 결정의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다야니가와 한국 정부 간 분쟁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산관리공사(캠코), 우리은행 등 채권단은 대우일렉트로닉스의 우선협상대상자로 다야니 소유의 이란계 가전 업체 엔텍합을 선정했다. 산업은행이 인수금융을 제공하겠다며 투자의향서를 발급했고, 다야니 측은 채권단에 계약금 578억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후 산업은행이 다야니가의 자금조달 계획에 문제가 있다며 투자확약서 발급을 거절했고, 캠코는 계약금 578억원을 몰수하고 계약 파기를 선언했다.
다야니가는 채권단에 정부기관인 캠코가 포함됐다는 점을 들어 2015년 유엔국제상거래위원회(UNCITRAL) 중재 절차에 따른 ISD를 제기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이란 경제제재 가능성을 우려해 이란계 자본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이다. 주무부처인 금융위는 ‘승소’를 자신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지난해 6월 중재재판부는 계약금과 이자 등을 합쳐 730억원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한국 정부의 ISD 패소 첫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대노’하며 대책 마련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취소소송 후에도 분쟁 계속될 듯
정부는 한 달 뒤인 지난해 7월 영국 고등법원에 ISD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ISD는 단심제여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재판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영국 고등법원에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영국 법원의 취소 결정을 받아내면 ISD 결과에 따른 배상책임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이를 정당화할 ‘국제적 명분’이 생겨서다.
다야니가는 가압류 작전으로 응수에 나섰다. 기업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온 네덜란드 로테르담 지방법원을 통해서다. 로테르담 법원은 해운, 항만 및 상업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해 유럽 내 명성이 높다. 법관 격인 200여 명의 심사위원이 연 21만 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가압류 결정에 따라 즉각 압류될 채권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 기업들이 정부에 갚을 빚이 없단 얘기다. 그럼에도 다야니가가 가압류에 나선 것은 기업을 볼모로 삼아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정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정부는 부처 간 회의를 열고 긴급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해당 한국 기업들이 정부에 진 빚이 없다는 건 다야니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며 “730억원을 받아내기 위해 먼저 국내 기업을 잇달아 공격해 정부를 괴롭히겠다는 속내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다른 국가 법원에서도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다야니 측의 가압류 신청이 제기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우선 정부는 영국 법원의 취소소송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분쟁이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법조계에서 나온다. 한국 정부는 영국 법원 결정을 토대로 배상 책임을 부정하고, 다야니가는 ISD 결과를 토대로 다른 나라에 있는 한국 정부 자산에 대한 가압류 소송을 할 수 있어서다.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다야니가가 “한국 정부가 국제 신뢰를 저버리고 ISD 결과에 따르지 않는다”고 국제 여론전을 펼치면 한국 대외신인도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점도 정부의 고민이다.
론스타 등 ISD 6조원 이상 걸려있는데…정부 '첫 패소' 다야니家 공격에 초비상
5조원대 론스타 승소 장담 못해…배상액 1조 안팎이면 성공 평가도
'ISD 패소 → 정부 취소소송' 땐 압류 줄잇고 신뢰도 타격 우려
그동안 6조6000억원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당한 정부는 이란 다야니가(家)의 가압류 추진이 다른 ISD 사건에 어떤 영향을 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소송 규모만 5조3000억원대인 미국계 사모펀드(PEF) 론스타와의 ISD 중재 결과가 하반기 나올 예정이지만 정부의 승소를 장담할 수 없어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정부는 국무조정실장이 주재하는 관계부처 태스크포스(TF)와 법무부 법무실장이 주재하는 분쟁대응단을 꾸려 ISD에 대응하고 있다. TF가 중요 사항을 결정해 부처 간 이견을 조정하고 분쟁대응단은 실무 중재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법무부 외에도 다야니, 론스타, 스위스 승강기 제조회사 쉰들러 등의 ISD 사건에는 금융위원회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메이슨ISD에는 보건복지부, 미국 동포의 토지수용 관련 ISD 사건에는 국토교통부가 주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다야니가의 가압류 추진에 “실제로 돈을 받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 차원에서 구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금융위 등이 취소소송을 주도했지만 결과를 뒤집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올해 하반기 결과가 나올 론스타 ISD에서도 패소 후 정부의 취소소송이 다야니가처럼 ‘기계적’으로 이뤄지면 세계 정부의 자산을 상대로 가압류 신청이 제기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법조계에선 론스타 ISD에서 정부가 한 푼도 내지 않는 ‘완전한 승소’는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있다. 론스타 측이 요구한 배상금액(5조3000억원)을 1조원 안팎으로 줄이느냐가 관건이라고 본다. 정부는 막대한 배상금이 나올 경우 론스타 측에 분할 납부 등을 협의할 것으로 전망된다. 론스타 ISD 판정을 맡은 의장중재인 조니 비더는 그동안 ISD 시장 확대를 위해 정부보다 투자자와 기업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검찰 조사로 드러난 이전 정부의 ‘국정농단’에 이은 ‘사법농단’은 ISD 제기 측의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부의 개입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재판 결과도 ‘사법농단의 결과’라며 통째로 부정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국제 소송 압류 사례보니…
왕실 비행기부터 군함·화물운송선까지 줄줄이 압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같은 국제 소송은 강제성이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처럼 국가와 국가가 체결하는 투자협정에 제기 요건을 명시한 만큼 ‘국제신뢰’ 그 자체가 구속력을 갖는다.
그렇다 보니 일부 국가에서는 소송 결과에 따른 배상 책임을 미루거나 이행하지 않는 사례가 발생한다. 국제소송 결과를 이행하지 않으면 투자자 측은 각 나라 법원에 해당 국가의 자산을 압류해달라는 청구를 낸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아프리카 가나에 정박 중인 아르헨티나 군함(사진)을 가나 법원 결정에 따라 가압류한 게 대표적 사례다. 아르헨티나 국채가 폭락했을 당시 엘리엇은 액면가 7% 수준으로 국채를 사들였고 훗날 아르헨티나 정부에 국채를 액면가로 사달라고 요구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이를 따르지 않자 엘리엇이 군함까지 압류해버린 사건이었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원리금의 75%인 46억530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엘리엇과 합의했다.
독일 법원이 독일 건설업체의 청구에 따라 태국 왕세자의 전용기를 가압류한 사례도 있다. 월터바우라는 건설업체가 방콕 고속도로 사업에 참여했다가 사업이 좌초되면서 입은 손해금 3000만달러를 배상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태국 정부가 배상금을 주지 않자 벌어진 일이다.
국적항공사의 항공기를 압류한 사례도 있다. 1998년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자국 경제 위기 해소를 위해 정부 공사 발주를 모두 취소했다. 인도네시아 지열발전소 건설공사에 투자한 한 미국 투자자는 자신이 1200여억원의 손해를 입었다며 국제상업회의소(ICC)에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이를 이행하지 않자 이 투자자는 영국 런던에 착륙한 인도네시아 국적의 가루다항공 소속 항공기를 가압류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손해금을 전액 배상했다.
한국 기업이 외국 정부 산하기관 자산을 압류한 사례도 있다. SK건설은 베트남정부가 일방적으로 반퐁항만 프로젝트를 중단하면서 입은 손해에 대해 베트남국제중재센터를 통해 33여억원의 배상 결정을 받아냈다. 이를 근거로 2014년 2월 부산항에 들어온 베트남 국영기업 소유의 대형 화물운송선을 가압류했다.
고윤상/안대규/강경민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