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법원 못 믿겠다…사법신뢰 추락에 ISD소송 '비상'

입력 2019-02-12 18:50
Law & Biz

국정농단 사법농단에 'ISD發 청구서' 쌓여갈듯
론스타, 중재판정부에 추가 서류 제출 가능성
재판개입 논란에 정부측 대응논리 약해 질수도
남미 수준으로 떨어진 한국 사법부 위상
"신뢰도 회복하는 데 10년이상 걸릴 듯"


[ 안대규/고윤상 기자 ]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기소되는 등 한국 사법부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한국이 진행하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ISD에 나선 해외 기업들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근거로 간접적으로나마 정부의 부당한 개입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중재 재판부를 설득할 여지가 생겼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 등과 총 6조6000억원 규모의 소송을 벌이고 있다.

ISD는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외국인 투자자가 손해를 입었을 때 국가 간 협정을 통해 제기한다. 소송의 승패는 정부의 부당한 개입을 증명할 수 있느냐에서 갈린다. 사법부를 통한 정부 개입도 당연히 소송 결과에 반영된다. 그동안 원고 기업들은 한국의 사법부 신뢰도에 이렇다 할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권 사법신뢰도 ‘톱티어(선두그룹)’ 국가로 평가받아왔기 때문이다.

국내 중재 전문가들은 외국 기업들이 ‘사법농단’이라는 ‘호재’를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으로 분석한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활약한 중재업계 고위관계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기소 등의 파장이 정부의 ISD대응을 상당히 어렵게 할 것으로 본다”며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이런 상황과 마주했다면 마찬가지로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도 “당사국 사법부 신뢰도가 ISD 승패에 큰 영향을 준다”며 “수년간 소송을 준비해왔는데 국정농단 사건에 더해 사법부에서까지 문제가 터지니 허탈하다”고 털어놨다.

당장 관심을 끄는 사건은 올해 판정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소송가액 5조3000억원 규모의 론스타 ISD다. ISD 중재인으로 활동했던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론스타 사건에 직접 관여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사법시스템의 문제가 드러난 만큼 론스타가 중재판정부에 의견을 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론스타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ISD를 시작했다. 외환은행을 되파는 과정에서 금융위원회가 매각 승인을 지연시켰다는 것과 투자이익에 대한 국세청의 과세가 부당하다는 점이다.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 박탈과 국세청과의 세금 관련 소송 등의 판결은 양 전 대법원장 재직 기간(2011년 9월~2017년 9월)에 상당수 이뤄졌다. 외환카드 주가 조작 사건의 핵심 연루자였던 유회원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는 2012년 2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유죄가 확정됐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대법원에선 론스타와 국세청간 1000억원대 세금 소송 판결이 4건 이상 나왔다. 론스타 측이 국세청의 과세를 법원이 확정해주는 과정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취지의 부수적 주장을 펼칠 여지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론스타 ISD는 변론을 종결하고 최종 결정문 작성 과정에 있다. 이 때문에 사법농단 여파로 결론이 뒤집히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하지만 의장중재인인 조니 비더의 귀에 흘러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비더 중재인은 그렇지 않아도 정부보다 투자자와 기업에 우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비더는 2009~2011년 론스타와 예금보험공사간 국제 중재에서 론스타측에 유리한 판정을 내린 바 있다. 법조계에선 론스타측이 요구한 배상금액(5조3000억원)에서 정부가 1조원 안팎으로 줄이는 데 성공하면 어느정도 승소한 것으로 평가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메이슨, 스위스 승강기 제조회사 쉰들러 등이 제기한 ISD도 이번 사태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엘리엇은 2015년 6월 삼성물산 3대 주주로 있다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에 문제가 있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 합병 과정에 정부의 영향력이 미쳤다는 엘리엇의 불만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등을 통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재판 결과를 ‘사법농단의 결과’라며 통째로 부정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2013년 이사회의사록열람등사허가신청 기각, 2014년 신주발행유지청구 소송 기각, 2016년 손해배상청구소송 기각 등 한국 법원에서 유달리 많은 패소를 경험한 쉰들러도 사법농단을 반전의 기회로활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중재업계 고위관계자는 “사법신뢰도는 선진국의 징표인데, 이번 사건으로 한국 법원은 중국과 브라질 수준으로 평가받게 됐다”며 “앞으로 한국에서 재판받길 꺼려하는 외국 기업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이번에 추락한 한국 사법부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10년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비영리법인 ‘세계 사법정의 프로젝트(World Justice Project)’가 매년 발표하는 ‘법의 지배 지수(Rule of Law Index)’에서 한국은 2015년 11위에서 2016년 19위, 2017년 20위로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안대규/고윤상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