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개막 '설경 100선'展
인물화·풍경화 넘나드는 大家
2008년부터 설악·정선 등 찾아
10년간 설경만 1만여 컷 스케치
100컷 골라 작년말~올초 작업
6호소품으로 완성…노화랑 전시
유화물감으로 거친듯 섬세하게
겸재 정선의 진경정신 살려냈죠
[ 김경갑 기자 ]
경기 고양시 삼송테크노밸리에 있는 이원희 화백(64)의 화실은 높다란 천장이 그림의 성전 같은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문을 열자 두툼하고 따뜻한 손이 덥석 손님을 반긴다. 노란색 재킷과 무테안경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을 아는 데는 손이 제일이라 했던가. 악수만으로도 그의 인생 반 너머가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난해한 현대미술이 판치는 화단에서도 꿋꿋하게 구상화와 인물화에 천착해온 이 화백은 작은 캔버스에 둘러싸여 눈빛마저 눈처럼 빛났다. 천재 화가 이인성 등 걸출한 대구 화단 선배들의 구상화풍을 계승하는 그는 “창작의 은밀한 처소인 작업장에서 매일 삶의 희망을 건진다”고 했다.
“2008년 대구 작업실을 뒤로하고 슬그머니 서울 도심(부암동)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북적거린 분위기가 좀 거시기 했는데, 요즘은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립네요. 2017년 정년을 5년 앞두고 20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면서 작업실도 여기로 옮겼죠. 오히려 차분하게 버티며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계명대 미대 학장을 지낸 이 화백은 때묻지 않은 자연의 속살과 사람의 체취를 무던히 좇아왔다. 국내외 화단에서 추상화의 대반격으로 구상은 저물어가는 장르라고 치부됐을 때 그는 “구상이란 인간에게 안식을 주는 그림”이라고 반기를 들었다. 그가 수십 년 자신의 전시회 제목으로 일관하고 있는 ‘풍경’은 미술사적으로 구상회화의 특별함을 상징한다.
오는 13~23일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여는 ‘유화로 그린 겨울 풍경’전 역시 정통 구상회화의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뜻을 야무지게 보여주는 자리다. 2008년부터 10년 동안 설악산, 안동, 정선 등 설경을 찾아 스케치한 1만 컷 가운데 100여 개를 골라 유화로 채색한 6호(40.9×27.3㎝) 크기의 설경 그림 100점을 건다.
김영삼·박근혜 전 대통령,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의 초상화를 그려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가 전시에 맞춰 보내온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작품’이다. 미술 경기 불황을 반영해 점당 판매가격을 시중보다 최고 30% 낮은 균일가 300만원으로 책정했다. 40년 고집과 끈기로 일궈낸 ‘이원희판 설경’은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구현했던 진경산수의 현대판처럼 보인다.
이 화백 구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땅의 풍경을 과감하게 화폭에 투입하는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 화성(畵聖)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포착한 산수와 과연 같은가를 수없이 고민해 왔다. 서양화 기법의 사실적 풍경에 문기(文氣)와 문향(聞香)을 넣는 방법으로 겸재와 단원의 진경 정신을 구현하는 그 돌파구가 설경이다.
그는 “겸재처럼 ‘스케치 여행’을 다니며 미술캠프를 시작한 것도 나를 붙들어 매겠다는 선언”이라며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희생된 자연을 다시 소생하려고 몸부림치는 우리 자연과 함께 있겠다는 뜻을 그림으로 토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작업실의 한쪽 벽면을 온통 장식한 그림들은 수묵화 같은 해맑은 손맛과 색감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흰 눈에 덮인 인적 드문 마을과 묵묵히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제자리를 지키는 겨울산의 바위, 설화를 가득 피워내고 있는 늘 푸른 소나무, 그리고 눈밭 한가운데 점점이 홍시 빛 물감을 흩뿌려 만든 듯한 까치밥. 눈밭에 고즈넉하게 움츠린 고택 등에선 하얀 미감이 주르르 흐를 것만 같다. “카메라로 줌인하듯이 우리 산하를 재해석해 자연의 맥박을 잡아냈다”고 이 화백은 짤막한 설명을 달았다.
하얀 눈을 가볍게 쳐올린 붓 맛도 살아 움직인다. 유화의 기름기와 끈끈한 점성에도 불구하고 화면마다 적막감 속에 청량감이 넘친다. 소담한 겨울 산하의 풍취가 아련하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회화미가 자연스럽게 묻어나 맛깔스럽기도 하다. 이 화백은 유독 설경 그림에 집착한 이유에 대해 “현대인들의 잡다하고 이기적인 감정을 치유해 내기 위한 행위”라고 했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하얀 눈 속에 녹여내기 위한 붓질이라고 강조한 작가의 한마디가 귓전을 가볍게 두드린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