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이두용 작가의 '여행 두드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지붕이 알록달록 '레고 성당'…이별의 슬픔 간직한 '실연박물관'
크로아티아의 '국민 보물'
자그레브 대성당 눈길 끌어
큰 불 났던 스톤게이트
마리아·예수 그림만 멀쩡
‘크로아티아’를 얘기하면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부르는 두브로브니크를 먼저 떠올린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감싸 안은 주황색 지붕들은 강렬한 대비만큼 인상 깊다. 국내 TV에서 앞다퉈 소개한 곳도 두브로브니크였다. ‘꽃보다 누나’를 비롯해 여러 편의 광고가 이곳에서 제작됐다. 두브로브니크에 가려 놓치기 쉬운 곳이 수도 자그레브다. 실제로도 두브로브니크로 향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 이 작은 도시가 크로아티아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대변하는 곳인지 알게 된다. 크로아티아의 심장일 수밖에 없는 곳, 자그레브에 대해서.
크로아티아의 보물, 자그레브 대성당
크로아티아의 첫걸음 자그레브. 공항을 나서는데 가장 먼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치도록 푸르다. 우리네 가을보다도 짙다. 거기에 낮은 건물 위로 목마라도 탈 것처럼 잔잔히 깔려 있는 구름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신비로웠다.
여행의 추억은 멋진 풍경과 함께하는 사람의 영향이 크지만, 날씨의 비중도 무시하지 못한다. 자그레브의 첫인상은 날씨만으로도 이미 90점 이상은 줄 수 있었다. 놀라운 건 이곳을 찾은 대부분 사람이 비현실적으로 느낄 만큼 좋은 날씨를 경험한다는 것. 자그레브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도시에 들어서니 나지막한 건물 사이로 높은 첨탑이 보인다. 지도를 펼쳐 들고 첨탑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골목과 골목 몇 개를 지나니 시야가 트이면서 성당 하나가 나타난다. 자그레브 대성당이다.
이곳은 1993년 발행된 크로아티아 화폐 1000kn(쿠나)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명소다. 오스트리아 빈의 성 슈테판 성당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성당의 외형과 입구 양쪽에 우뚝 선 첨탑이 슈테판 성당과 닮았다. 첨탑의 높이는 105m로 자그레브 시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다. 1093년 헝가리 왕이었던 라디슬라스(Ladislas)가 건축을 시작해 1102년 완공했고 1217년 성모마리아에게 헌정됐다. 건축된 시기로는 성 슈테판 성당보다 앞선다. 하지만 외세의 침공과 여러 번의 화재로 수차례 복구됐고 현재의 모습을 갖춘 건 17세기 이후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순식간 정적이 흐른다. 몇몇이 강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고요한 분위기와 어울려 평화롭다. 정면 중앙에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인상적이다. 성당 내부의 면적은 1671㎡로 최대 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밖으로 나오니 들어올 때 보지 못했던 분수대와 그 중앙에 올라선 황금 성모마리아 상이 보인다. 푸른 하늘과 대조돼 황금빛이 더 화려하게 빛난다. 아래에는 네 명의 황금 천사상이 성모마리아를 호위하고 있다. 이 넷은 기독교의 네 가지 덕목인 믿음과 소망, 순결, 겸손을 상징한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자그레브뿐 아니라 크로아티아 국민이면 모두 자랑스러워할 만한 보물이자 최고 명소다. 자그레브 여행의 첫 번째 코스로 손색없다.
성지순례지가 된 스톤게이트의 비밀
성당에서 큰길을 따르니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i Square)이 나타났다. 자그레브는 시내가 작고 명소가 대부분 중앙에 몰려 있어서 하루 정도면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도보 여행의 베이스캠프를 찾을 땐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광장이 좋다. 반 옐라치치 광장은 시내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중심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시가지가 형성돼 있어 기점으로 두기에 좋다. 광장은 최초 17세기에 만들어졌고 수 세기를 이어오며 자그레브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광장의 이름은 과거 자그레브의 총독을 지냈던 반 옐라치치에서 따왔다. 광장의 형태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스타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광장 중앙에는 1866년 오스트리아 조각가가 만든 반 옐라치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어찌나 정교한지 지금이라도 뽑아 든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전진할 것 같다.
광장 뒤로 난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늘진 안쪽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스톤게이트다. 이곳은 크로아티아가 올드 그라데츠로 불리던 13세기에 지역을 감싸던 4개의 문 중 북쪽을 지키던 문이었다.
원래 성문에는 화려한 나무 장식이 돼 있었는데 1731년 대화재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만 전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화재 이후 이 그림은 신성한 그림으로 추앙받게 됐고 이곳 역시 성지순례지가 됐다. 전설에 의하면 성모마리아 그림이 발견된 곳은 이곳 재 한가운데였으며 액자만 탔을 뿐 그림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스톤게이트의 안쪽에 바로크 양식의 제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그림을 모셔놓게 됐다.
평일 낮인데도 여러 사람이 그림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고 있다. 먼발치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여럿이다. 게이트 안쪽을 들여다보니 팔을 뻗으면 닿을 법한 거리에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 놓여 있다. 화재를 겪었다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깨끗하게 보존돼 있었다. 스톤게이트는 밝은 대낮에도 그늘이 지는 문 모서리 안쪽에 있어 이곳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간절함이 생기는 것 같다.
레고처럼 섬세하고 예쁜 성마르크 성당
스톤게이트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자그레브 명소 중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 마르크 성당(St. Mark Church)이 나타난다. 이곳은 푸른 하늘과 화려한 매칭을 이루는 지붕의 모자이크가 유명하다.
이 타일 모자이크는 꼼꼼한 예술가가 건물 지붕에 십자수로 문양을 낸 것처럼 섬세하고 예쁘다. 컬러도 다양한데 하얀색과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을 적절히 섞었다. 마치 장난감 블록으로 지은 것 같다고 해서 ‘레고 성당’이란 별명도 얻었다. 푸른 하늘과 함께 사진에 담아내면 그 자체로 한 장의 그림이 된다.
이 화려한 패턴 중앙에는 두 개의 문양이 새겨 있는데 왼쪽은 크로아티아 최초의 통일 왕국인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왕국의 문장을 표현한 것이고 오른쪽은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다.
각각의 의미가 있는 모자이크지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사실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컬러 조합과 그림 표현이 재미있다. 보는 이마다 절로 미소를 짓는다.
이곳에서 하늘과 건물 지붕에 감탄했다면 다음은 로트르슈차크 탑을 찾아가는 게 좋다. 성 마르크 성당에서 스톤게이트를 지나 조금만 아래로 내려오면 된다. 이젠 ‘하늘+건물 지붕’이 아니라 ‘하늘+도심의 건물’을 만날 차례다. 이곳에 서면 자그레브의 건물들이 하늘과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탑 전망대에 올라가면 높은 곳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지만, 입구와 뷰의 차이가 크지는 않다. 입구까지만 가서 뒤를 돌아다 봐도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눈에 보이는 도시 풍경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풍경처럼 비현실적이다.
여행의 기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진인데 이곳이라면 누구나 작품사진 몇 장을 얻을 수 있다. 고급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하다. 작품은 장비가 아니라 장소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이곳에서 베이스캠프인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가장 빨리 내려가는 방법은 푸니쿨라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되는데, 이것 또한 명물이다. 길이가 고작 66m로 세계에서 가장 짧은 케이블카다. 레일을 타고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데도 고작 1분 정도가 걸린다.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태양이 도시를 끌어안고 서쪽으로 떨어지는 시간엔 1분 동안 가장 아름다운 골든타임을 선사할 환상의 특급열차가 돼주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사연 간직한 실연박물관
자그레브는 사실 미술관과 박물관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마라미술관, 현대미술갤러리, 메슈트로비치 아틀리에를 비롯한 다양한 미술관과 박물관이 자리한다. 음악과 연극, 무용 등의 공연도 곳곳에서 펼쳐진다. 예술 감상만을 위해 도시를 찾아도 머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독특하고 특별한 박물관도 있다. 예술에 관심 없는 사람도 누구나 솔깃해할 ‘실연박물관’이다. 세상의 모든 헤어짐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곳인데 구구절절한 편지에서부터 그들만의 사연으로 눈물 없이는 지나칠 수 없는 다양한 물건이 전시돼 있다. 유치한 풋사랑에서 비롯된 미소 지어지는 가벼운 이별 선물도 여럿 있지만, 엄마가 자살하면서 자녀에게 남긴 유서나 아기가 유산되면서 이젠 쓸모없어진 유아용품처럼 안타까움과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전시품도 제법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어떤 사연엔 웃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연엔 울기도 한다. 그 어떤 이별이 즐겁기만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가벼운 일이 내게는 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느끼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것이 사랑이고 이별이 아닐까.
이곳의 관람이 끝날 때 즈음 기념품처럼 너도나도 하나씩 구매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나쁜 추억을 지우는 지우개(bad memories eraser)’다. 세상의 헤어짐을 눈앞에서 보고 난 후라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깨끗하게 지우리라는 다짐을 하며 하나씩 구입한다.
실연박물관을 나설 때 마음이 헛헛하다면 시원한 맥주 한 모금으로 속을 달래는 것도 좋다. 박물관에서 스톤게이트를 지나 쭉 올라가면 트칼치체바 거리가 나타난다. 길게 늘어선 거리 양쪽과 골목에 레스토랑과 노천카페가 즐비하다. 이곳은 자그레브 여행객의 필수 코스면서 여행의 노곤함을 맥주와 음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자그레브=글·사진 이두용 여행작가 sognomedia@gmail.com
여행정보
한국에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까지 대한항공 직항이 있다. 매주 세 번 월·수·금요일에 운항한다. 1회 경유하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루프트한자독일항공이 월~일요일 매일 운항하며 항공편도 시간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 편하다. 비행시간은 직항이 약 11시간30분, 1회 경유가 약 14시간 소요된다. 직항과 경유의 시간 차가 크지 않아 다양한 방법을 찾으면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공항에서 자그레브 시내까지는 기차나 버스를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다. 시내에 들어오기 전 공항이나 기차역, 터미널에서 크로아티아 화폐인 쿠나(HRK, Kuna)로 환전하는 것이 좋다. 급할 땐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이용하거나 카드를 사용해도 무관하다. 시내는 넓지 않아서 시간 여유가 있다면 도보여행을 추천한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는 6번 트램을 이용하면 된다. 10쿠나(약 1800원)만 있으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물가가 비싸지 않아 급할 땐 택시도 괜찮다.
자그레브는 두브로브니크나 플리트비체, 스플리트 등의 관광지에 비해 물가가 비교적 싸고 한국보다도 저렴한 편이라서 여행에 부담이 적다. 하루 이상 머물 땐 숙소를 예약하고 동선을 미리 정하면 보다 효율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