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독일차가 번창한다는 보장 없다…전기車 회사로 변신해야 살아 남는다"

입력 2019-02-07 17:13
Global CEO & Issue focus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 회장

관행 깨부수는 '폭스바겐의 싸움닭'

친환경 새 패러다임 주문
디젤게이트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뮐러 CEO 대신 폭스바겐 대표로
고질적인 관행 깨는 적임자로 꼽혀

비용절감 전도사
금융위기 때 공급망 효율화로 '미니' 살려내고 40억유로 절감
노조에 맞서 구조조정…수익 확대

기계공학박사 출신 공학도
2025년까지 전기차 비중 25%로…차량공유 사업도 재개 '변화' 주도
전기차 배터리 계약만 500억 유로


[ 이현일 기자 ]
독일 폭스바겐그룹은 지난해 역대 최대인 1083만 대(중대형 상용차 포함)의 신차 판매를 기록하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5년 연속 선두자리를 지켰다. 80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던 이른바 ‘디젤 게이트’를 잘 극복했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폭스바겐 이사회는 만족하지 않고 변화를 선택했다.

이사회는 구원투수로 나섰던 마티아스 뮐러 전 최고경영자(CEO)를 지난해 4월 경질하고 헤르베르트 디스 승용차부문 대표를 그룹 CEO로 승격시켰다. 유럽연합(EU)의 강화하는 환경 규제에 대한 대처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스 CEO는 폭스바겐을 전기차 회사로 전환하는 데 그룹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는 취임 뒤 미국으로 건너가 디젤 게이트와 관련해 조사를 받았고 작년 12월엔 수입차에 관세 폭탄을 부과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논쟁을 피하지 않는 ‘싸움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지난해 4월 최고 성과를 거둔 뮐러 전 폭스바겐 CEO의 전격적인 경질 소식을 알렸다. 독일 일간지 빌트 등은 대주주 페르디난트 피에히 전 회장 등 창업주 일가와의 갈등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업계에선 “디젤 스캔들로 곤욕을 치른 폭스바겐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새 출발을 선언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폭스바겐에서만 40여 년간 일한 뮐러 전 CEO는 위기 극복의 일등공신이었지만 지속적인 개혁을 이끌 적임자는 아니라는 평가가 많았다. 폭스바겐은 외부진단 결과 수직적이며 경직된 조직문화, 제왕적 리더십 등이 심각한 문제로 꼽혔다. 2015년 미국 환경보호청(EPA)에 적발되기 전까지 조직적으로 디젤차 배기가스 성능시험을 조작한 것도 이 같은 문화 때문이란 지적이다.

BMW 출신으로 2015년 7월 폭스바겐에 합류한 디스 CEO는 이 같은 경직적인 기업 문화를 개혁할 적임자로 꼽혔다. 논쟁을 피하지 않는 성격 탓에 ‘싸움닭’으로까지 불렸던 그다. 이사회는 이 같은 성격이 오히려 폭스바겐의 고질적인 관행을 깨뜨리는 데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디스 CEO는 비용 절감 전도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BMW의 영국 버밍햄과 옥스퍼드 공장을 효율화시켜 1990년대 인수한 ‘미니’ 브랜드를 살려냈다. 2007년부터는 BMW의 구매·협력업체담당 총괄 사장을 맡아 40억유로의 비용을 절감해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회사를 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폭스바겐으로 옮긴 뒤에도 수익성 확대를 주도했다. 생산량이 비슷한 도요타에 비해 30%가량 더 많은 직원 수를 줄이기 위해 노동조합과 1년 넘게 협상했다. 그는 끝내 글로벌 인력을 3만 명가량 구조조정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디스가 CEO 취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 프랑크푸르트 증시에서 폭스바겐 주가는 전날 대비 4.5%나 상승했다.

내연차 대신 전기차 선택한 기계공학도

디스 CEO는 취임 후 12개 브랜드로 나뉜 조직을 양산차(폭스바겐·스코다) 고급차(아우디) 럭셔리카(벤틀리·부가티) 트럭·버스로 개편했다. 직원들은 소속 부문에서 아이디어를 공유하도록 했다. 또 그룹 승인을 받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이 자율적으로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디스 CEO는 “중앙에서 내린 결정에 의존하는 문화로는 살아남기 힘들다”며 “일의 진행이 느려지더라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절차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임원들의 반대로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던 차량공유 사업도 2020년을 목표로 다시 시작했다.

디스 CEO는 전기차 개발과 대량생산 일정을 앞당기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기존 생산 인프라와 판매망을 최대한 활용해 가솔린차와 비슷한 가격으로 다양한 전기차를 선보여 단숨에 업계 1위 테슬라를 앞지른다는 계획이다.

뮌헨 공대 출신의 기계공학 박사인 디스 CEO가 가솔린·디젤 자동차 비중을 과감하게 줄이는 것은 위기감 때문이다. 그는 작년 10월 볼프스부르크 공장을 방문해 “독일 자동차 공업 도시도 계속 번창할 것이란 보장이 없다”며 “미국 디트로이트, 이탈리아 토리노, 영국 옥스퍼드 등 한때 강력했던 자동차 도시의 상황을 여러분도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디스 CEO는 BMW 연구개발(R&D) 책임자 시절 ‘i 시리즈’ 하이브리드차량(HEV) 개발을 진행했다. 그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전기차는 공간이 넉넉하고 깨끗하고 유지비용도 적은 데다 운전하기 재미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기차 연 1500만 대 생산한다

폭스바겐은 장기적으로 전기차 생산 규모를 연간 1500만 대로 확대하기로 했다. 뮐러 전 CEO 시절 폭스바겐은 2022년까지 약 340억유로를 전기차에 투자한다고 발표했으나 디스 CEO 취임 후 투자액은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중국 CATL을 비롯 LG화학, 삼성SDI 등과 맺은 2025년까지의 배터리 공급 계약 규모만 500억유로를 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2025년까지 80여 종의 전기차를 출시해 전체 판매량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을 25%로 높일 계획이다.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10~15%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게 중·단기 목표다. 이를 위해 미국 1곳과 중국 5곳을 포함한 세계 16개 공장을 4년 내 증설하거나 전기차 공장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기가 팩토리와 비슷한 배터리 공장도 10년 내 6곳 정도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난달 미국 테네시주 채터누가 공장 등에 8억달러(약 8955억원)를 투입해 전기차 공장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2022년부터 생산을 시작할 방침이다. 폭스바겐은 현재 채터누가 공장에서 승용차인 파사트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아틀라스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와 생산 시설과 차량 플랫폼을 공유하는 전략적 제휴도 추진한다. 중국 안팅과 포산에도 전기차 생산 시설을 도입하고 독일 하노버와 엠덴에는 2022년까지 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자동차의 동력 부품을 전기구동모듈(MEB) 플랫폼으로 규격화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에 라이선스 제조를 허용할 계획이다. 디스 CEO는 “아직 배터리팩과 모터로 달리는 자동차가 엔진 구동 차량보다 비싸기 때문에 가격을 낮추는 게 급선무”라고 전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na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