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수탁자인 정부가 사실상 상전 노릇"

입력 2019-01-30 17:45
한반도선진화재단 '국민연금 기업경영 개입' 세미나

기금운용 잘하는 게 수탁자 역할
선의로 개입해도 결과에 악영향
'헤지펀드 놀이터' 만들어주는 꼴

現 지배구조로는 독립성 불투명
脫정치화·재정건전성 확보 시급


[ 심은지 기자 ]
“정부는 국민연금 수탁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면서 사실상 상전 노릇을 하려 한다.”(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선의로 개입하더라도 결과는 부정적일 수 있다. 결국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진칼과 대한항공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범위를 두고 사회적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국가가 국민연금을 통해 개별 기업의 경영권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저해하고 장기적으로 수익률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구조를 탈(脫)정치화하고 경쟁력 있는 운용 역량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 과제라고 조언했다.

수탁자책임위, 개별 기업 분석 역량 있나

양준모 교수는 30일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개입: 문제점과 대안’ 세미나에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 운용의 전략과 방향을 설정하는 곳이지 회사 경영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 아니다”며 “정부가 기업 경영권에 마음대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세미나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재완)이 주최하고 한국경제신문사가 후원했다.

양 교수는 수탁자책임의 정의부터 다시 짚어봐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하게 이행하겠다’는 명목으로 작년 7월 국민연금에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 원칙)를 도입했다. 이를 근거로 설립된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의 이사 해임, 정관 변경 등 경영참여형 주주권 행사 여부를 논의 중이다.

양 교수는 “수탁자책임은 수탁자가 행사하는 권한이 아니라 국민에게 약속하는 의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기금 운용 수익률이 마이너스였는데 만약 수탁자책임을 다하도록 한다면 국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국민연금 이사장을 해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위는 개별 기업의 사정을 연구할 조직과 예산이 없다”고도 했다.

대한항공 사례와 관련해선 “대주주 일가의 비도덕적 행태로 주가가 흔들렸다지만 경영진의 도덕성과 능력 부족 문제인지, 다른 요인 때문인지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연금의 경영권 개입은 결과적으로 펀드들의 놀이터를 마련해주는 꼴”이라며 “펀드의 선동과 정치 세력의 결탁으로 기업 가치 제고보다 단기적 시세차익을 노리는 펀드들이 (주가 흐름에) 개입할 여지가 커진다”고 말했다.

“탈정치화가 우선 과제”

현재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구조로는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국민연금의 독립성·투명성부터 제고해야 한다는 얘기다. 주진열 교수는 “기관투자가의 개입이 피투자기업 이익 증대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막연한 추측이자 기대”라며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위가 극히 복잡한 시장환경을 모두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기 때문에 선의로 개입하더라도 결과는 부정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국민연금의 지배구조상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투자 역량까지 취약해진다”며 “정치적 고려에 의한 의결권 행사는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부적절하게 개입해 기업 가치가 추락하더라도 가입자들은 가입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게 문제”라며 “국민연금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인 만큼 정부가 과도한 권한을 행사하면 파장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심은지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