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호모사피엔스의 생존 본능, 수십만년 지나 질병의 씨앗으로

입력 2019-01-24 17:35
진화의 배신

리 골드먼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 560쪽│2만2000원


[ 서화동 기자 ] 현대인의 고혈압 중 약 95%는 특별한 원인 질환 없이 나타나는 ‘본태성 고혈압’으로 분류된다. 미국 컬럼비아대병원 원장인 심장병 전문의 리 골드먼은 그러나 ‘본태성 고혈압’은 나트륨 조절장치가 잘못 맞춰져서 생긴 것을 어렵게 표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탈수증 방지를 위해 체내 나트륨을 보존하거나 동맥을 수축하는 일을 맡은 호르몬 중 하나 이상이 과다 분비됐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아이러니한 것은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처음 출현한 20만 년 전부터 탈수증 방지를 위해 물과 소금을 충분히 체내에 저장하도록 길들여진 인체의 자기보호체계가 거꾸로 최악의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골드먼은 《진화의 배신》에서 역사와 진화의 거대한 맥락 안에서 유익한 유전자들이 어떻게 자연선택으로 살아남고 실제로 작동해왔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하면서 비만, 당뇨병, 고혈압, 불안, 우울증, 심장질환, 뇌졸중 등의 현대병을 초래한 이 유전자들의 역습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호모사피엔스가 20만 년의 긴 세월 동안 멸종을 면하고 번성한 것은 경이로울 정도로 훌륭한 유전자 덕분이었다. 지구상에 출현한 생물 가운데 현재까지 살아남은 비율은 0.2%에 불과하다. 500종 가운데 1종만이 적자생존에 성공한 셈이다. 다른 동물에 비해 덩치가 크지도 않고 근력도 강하지 않은 인간이 포식자, 환경 재난, 전염병 등 온갖 적대적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영을 누리는 비결이 뭘까. 인간의 지능보다는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메커니즘에 따라 발달시켜온 유전형질 덕분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현생 인류가 등장하자마자 직면한 문제는 생존을 위협하는 굶주림, 탈수, 폭력, 출혈이었다. 이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방어체계가 형성됐다. 우선 굶주림에 대비해 인간은 음식이 생길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배불리 먹어두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를 위해 우리 몸은 20개 이상의 분자와 호르몬이 허기와 포만감 조절에 관여한다. 배와 허리, 둔부에 집중된 350억 개의 지방세포는 약 13만칼로리, 비만일 경우에는 1400억 개의 지방세포가 100만칼로리의 열량을 비축한다. “우리의 본능과 인체 내 조절장치는 과식을 해서라도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흡수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탈수를 피하는 것 또한 생존을 위해 중요했다. 인간이 자기보다 덩치가 크고 빠른 사냥감을 획득하는 방법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뒤쫓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구력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양의 땀을 흘림으로써 몸이 과열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자면 다른 포유류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했고, 물이 당기도록 짠 음식을 먹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소금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입맛과 생존을 위해 짠 음식을 먹고 싶게 하는 강력한 탈수방어기제를 만들어 냈다.

원시사회에서 폭력과 그로 인한 비명횡사는 일상사였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했고, 싸울 힘이 없을 땐 도망하거나 순종해야 했다. 이런 비명횡사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극도의 경계심과 두려움, 불안, 슬픔과 우울 등에 빠져들었고 이런 감정이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로 작용했다.

선사시대 인류에게 피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위험은 출혈이었다. 출산 과정의 출혈은 물론 사냥과 전투로 인한 출혈도 불가피했다. 구석기인의 12%, 초기 농업 정착민의 25%가 살인과 치명적 부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 신속한 혈액응고 대응체계를 낳았다.

문제는 현대에 와서 발생했다. 식욕과 열량 축적의 유전적 본능은 비만과 당뇨병, 심장 질환, 암 발병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굶주림과 아사로부터 지켜주던 과식 본능이 이제는 질병과 죽음이라는 역습의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탈수 방지를 위해 소금을 과잉 섭취한 본능은 예전만큼 땀을 흘리지 않는 데도 필요 이상의 소금을 섭취하게 해 심장병, 고혈압, 신장 질환을 초래하고 있다.

세상이 안전해졌는데도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본능적으로 남아서 불안증,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물론 자살까지 초래한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출혈도 마찬가지다. 각종 수혈 기술의 발달로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을 일은 거의 없는데도 인체의 혈액응고 시스템은 그대로여서 오히려 사망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혈전이 뇌동맥을 막는 심장마비와 뇌졸중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유전자가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생긴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각도의 해결책을 모색한다. 과잉보호 형질을 확산시키는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새로운 돌연변이 유전자로 그것을 상쇄하는 방법, 의지력에 의한 행동 변화, 운동과 심리치료, 약과 수술 등 각 개인에게 최적화된 치료법을 선택해 질병에 걸리기 전부터 맞춤형으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