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소리에도 맵시가 있다

입력 2019-01-23 17:50
고학찬 < 예술의전당 사장 kevingo@sac.or.kr >


우리는 사물을 무엇으로 분간하는가? 우선 눈을 통해 갖고 있는 모양새, 즉 맵시로 그것이 사람인지 동물인지 판단한다. 인간의 눈은 어찌나 예민한지 수백 명이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속에서도 자기 아들, 딸을 찾아낸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맵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럼 어두운 밤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 혹은 눈이 잘 안 보이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세상을 분간할까. 그것은 소리, 더 자세히 말하면 소리의 모양새로 가능하다. 이를 ‘소리맵시’라 부른다. 소리를 결정하는 것은 진동수와 진폭이다. 진동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진폭에 따라 소리의 크기가 달라진다. 여기에 소리가 내는 파장의 형태까지 달리하면 같은 음의 소리라도 무수히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 같은 ‘도’라도 바이올린이 내는 ‘도’와 플루트가 내는 ‘도’는 파장의 모양, 즉 소리맵시가 전혀 다르다.

냇가에서 뛰어놀던 여러 명의 아이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어서 와서 밥 먹어라”고 외치는 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과연 누가 집으로 뛰어갈까? 틀림없이 바로 그 어머니의 아이일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하늘에서 들려오는 철새 소리를 듣고 우리는 봄이 오는지 가을이 가는지를 알 수 있다. 귀뚜라미 소리의 여운으로 여름의 열기를 추억하고, 촛불을 밝힌 창문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로 겨울이 다가옴을 느낀다. 아침 닭의 울음소리로 그날의 일기를 예측하고, 매미들의 합창이 끝나면 한 계절의 끝을 알게 된다. 이처럼 저마다 다른 맵시를 자랑하며 우리를 감싸고 있는 자연의 소리는 참으로 아름답다.

도시에 사는 인간이 내는 소리는 어떠한가? 흉측한 소리맵시가 너무 많다. 그중에서도 자동차 경적 소리는 정말 최악이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뒤차가 ‘빵’하고 경적을 울리자 앞차 운전자가 뒤차 운전자를 총으로 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거리에서 시끄러운 경적 소리는 안 들었으면 좋겠다. 만약 꼭 필요하다면 경적 소리에 도레미 음계를 넣어 거리를 연주회장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헛된 상상도 해본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처럼 인생은 무대요, 인간이 배우라면 우리 목소리의 소리맵시도 조금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 ‘워터프론트’에서 부두 노동자 역할로, ‘대부’에서는 늙은 마피아 두목으로 분한 배우 말런 브랜도처럼 소리맵시를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각자 자기 인생에 맞는 대사를 하면 좋으련만. 세상이 온통 카랑카랑한 소리맵시뿐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소리맵시가 들렸으면 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