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낭만이 넘치는 쿠바여행 (9) 산타클라라
쿠바 산타클라라에 간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 칭해지던 사내의 이별 방식을 만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만남이었기에 아무 위로의 말도 없이 아주 산뜻한 이별을 준비한다면 산타클라라에 가서 체 게바라의 편지를 읽어보자. 이곳에는 남성 사이에 오간 공개된 이별 편지가 거대한 크기의 동상 옆 기념비 같은 탑에 새겨져 있다. 형식은 공식적인 이임사지만 내용은 뜨겁게 불붙었던 혁명에 대한 회고와 그와 함께 뜻을 같이했던 쿠바인들을 여전히 그리워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 중심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있다. 각자 제 갈 길로 가면서도 이렇게 서로에 대한 축복으로 어우러진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체 게바라가 1965년 4월1일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작별 편지다. 혁명을 사랑으로 바꾸면 애절한 사랑에 대한 이별가다.
이별을 준비한다면 체 게바라의 편지를 읽어 보라
세계 혁명의 아이콘이 된 우수 어린 매력남 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것은 덥수룩한 수염에 베레모를 쓰고 시가를 문 모습이다. 그에게 더 끌리는 이유는 그만의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독서광 면모를 과시하면서 배낭에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시를 필사하던 노트를 남겼다. 그 열정과 감성이 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겼다. 편지는 처음 만났을 때의 추억과 혁명의 긴장감에 대해 회상한다. 쿠바에서의 혁명이 완수돼 작별을 고하게 된 감상을 언급한다. 자신을 아들처럼 받아준 순수한 쿠바인들의 심성에 감사해하면서 압제가 살아있는 곳은 어디든 자신의 투쟁전선이 될 것이란 점을 강조한다.
편지 말미는 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선전구호로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 나온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조국 아니면 죽음을!” 혁명은 승리 아니면 죽음의 양자택일 과정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죽기 전까지 투쟁 속에서 살았다.
여행자들이 산타클라라를 찾는 이유는 확실하다. 체 게바라의 묘소와 기념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산타클라라는 1958년 후반 쿠바혁명에서 결정적 승기를 가져온 마지막 전투의 현장이다. 이 도시는 온전히 체 게바라의 도시라 불릴 만하다. 1958년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가 이끈 게릴라 부대는 이 도시를 공격했다. 체 게바라의 부대는 불도저를 사용해 철도를 파괴하고 바티스타가 보낸 군대와 물품으로 가득 찬 기차를 탈선시켰다. 1958년 12월31일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의 부대는 산타클라라를 공격했다.
오후에 도시는 점령됐다. 독재자 바티스타가 쿠바를 떠난 지 12시간도 안 돼 카스트로의 군대는 아바나에 입성한다.
기념관에는 체 게바라의 6m 동상 세워져
산타클라라는 쿠바 내 체 게바라의 상징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와 생사를 같이한 동지 17명의 유골도 함께 안치돼 있다. 기념관에는 체 게바라의 역사가 펼쳐져 있다. 죽음을 실패로 여기지 않고 ‘단 하나의 미완성 서사시의 슬픔을 무덤으로 가져갈 뿐’이라던 그의 생각과 흔적이 기념관 곳곳에 남아 있다. 6m에 이르는 동상을 바라보는 여행자들의 시선과 생각은 제각각이리라.
그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의 추억을 위해 이 거대한 동상을 만들었을까? 혁명의 열매로 차지한 권력을 두고 떠나간 체 게바라의 배려에 고마워서였을까? 체 게바라는 도시에 입성할 때처럼 팔에 깁스를 하고 있고 소총을 들고 수통을 차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예의 초연한 게릴라의 모습으로 서 있다. 체 게바라의 매력은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압제에 끊임없이 항거하는 자유를 향한 열정에 있다. 정치권력과는 거리를 두고 알량하고 치졸한 진흙탕 싸움에 끼지 않고 자신이 정한 인생 여정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길을 당당하게 걸었기 때문이다.
시가지 중심에 있는 기차박물관에는 열차 탈취에 사용한 불도저와 당시 전복된 정부군의 화물열차가 전시돼 있다. 부패한 정권의 정규군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에 가득 찬 혁명군의 기세에 완전히 눌리고 만다. 24명의 혁명군이 300명이 넘는 바티스타 정부군이 탄 기차를 습격해 성공을 거둔다.
체 게바라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총살형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가 된 뒤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처음에는 부대의 의사로 쿠바의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이후 전투지휘관으로 쿠바혁명(1959년)을 완수했다. 12명으로 시작한 혁명은 이들이 아바나에 입성하면서 성공을 이룬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이런 일시적인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1965년 이후에는 아프리카 각지를 방문하고 콩고내란 등 국제적인 혁명 투쟁에 참여한다. 1966년에는 볼리비아에서 볼리비아 민족해방군(ELN)을 인솔해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다음해인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총살형을 당한다. 그때 나이 39세였다. 의사로서의 안락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살려던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준 것은 여행이었다. 그가 목도한 라틴아메리카의 제국주의와 부당한 권력의 암울한 압제 현실은 그를 사회적 외과의사인 혁명가로 만들었다.
체 게바라를 생각하면 쿠바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파멸당할 수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며 청새치와의 치열한 승부를 펼치고 맨몸으로 돌아온 노인은 독백처럼 말한다. 위대한 인간은 아무런 희망도 없고 패배가 확실하더라고 끝까지 도전하는 사람이다. 여행자들이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의 동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일순간의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당당한 삶을 펼치며 세상을 편력하며 끊임없이 도전한 그의 도전정신이 아닐까?
산타클라라=글 최치현 여행작가 maodeng@naver.com
사진 정윤주 여행작가 traveler_i@naver.com
여행메모
산타클라라는 쿠바 비야클라라주의 주도다. 이 주의 가장 중심 지역은 거의 쿠바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다. 25만 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산타클라라는 인구로는 쿠바에서 5번째로 큰 도시다. 수도 아바나 동쪽 290㎞ 지점에 있다. 쿠바를 관통하는 도로·철도가 연결되며, 외항(外港) 시엔푸에고스까지 철도가 통하는 요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