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길 창업' 택한 이유? 세상 바꿀 기술, 논문에만 담기엔 아까웠다

입력 2019-01-15 17:37
수정 2019-01-16 09:28
기술창업에 미래 있다 (2) 국내서 싹트는 교수창업


[ 김기만/이우상/심성미 기자 ] ‘2.5%.’ 지난해 국내 전체 창업 기업 중 교수 창업 비율이다. 교수 창업 비율은 2009년 이후 10년째 제자리다. 경제적 안정과 명예가 보장된 대학 교수들이 창업에 나설 별다른 이유가 없다. 창업한 교수에게 가해지는 따가운 시선까지 감안하면 2%대 창업률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미국, 영국, 이스라엘 교수들이 창업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고 수출에 기여하는 건 그저 딴나라 얘기일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도 기술 창업에 나서는 교수가 있다. 동기는 다양하다. “20년간 연구한 ‘딸 같은 기술’을 차마 사장시킬 수 없다”, “개발한 기술을 논문에 적을수록 오히려 공허함을 느껴서” 등. 창업이라는 가시밭길에 나선 ‘2.5%’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3차원 VR지도, 기업이 탐냈지만…딸 같은 특허기술 팔수 없었다"

도락주 교수 (티랩스 대표)

도락주 티랩스 대표(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20년간 가상현실(VR) 기술을 활용해 공간을 재현하는 기술을 연구했다. 아들만 둘인 그는 2017년 ‘막내딸’처럼 애정을 담아 연구한 기술을 다른 기업에 넘기고 싶지 않아 창업에 나섰다. 도 대표가 박사급 연구원들과 함께 창업한 티랩스는 ‘VR 공간 지도’ 모델링에서 독보적인 특허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티랩스가 개발한 TeeVR(true eye everywhere virtual reality)은 언제, 어느 곳이든 눈으로 직접 보는 것 같은 가상현실을 재현한다. 자체 개발한 TeeVR 스캐너(로봇)를 사용해 단 한 번의 스캐닝으로 3차원(3D) 실내 실감 지도 데이터를 만들 수 있다. 이 데이터가 자동화된 소프트웨어 지도 제작 과정을 거치면 사용자가 거리와 높이 등을 쉽게 체험할 수 있는 3차원 지도가 나온다.

TeeVR은 공항과 대규모 쇼핑몰, 박물관 같은 공간을 그대로 가상화하고 저장한다. 시간이 지나거나 공간이 사라져도 그대로 증강현실(AR)과 VR 형태로 복원된다. 도 대표는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생생하게 보존하거나 학창 시절 추억이 담긴 학교를 VR 콘텐츠로 보관할 수도 있다”며 “쇼핑몰 매장을 스캔하고 가상공간에서 볼 수 있도록 전시하면 ‘VR쇼핑 서비스’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도 대표는 포스텍에서 로봇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6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여 년간 개발한 그의 기술은 세계 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외에서 40개가 넘는 특허를 출원했다. 도 대표는 자신의 특허를 ‘막내딸 같은 기술’이라고 비유했다. 그는 “오랜 시간 연구를 통해 개발한 기술이라 두 아들만큼 소중하게 생각한다”며 “자식 같은 기술을 외부에 넘기지 않고 직접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국내 대표적 정보기술(IT) 기업 등에서는 티랩스의 기술 특허를 50억원 이상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도 대표는 자신이 갖고 있는 특허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기술(특허법인 추정 사업 가치 2000억원)이라 생각하고 기술 이전 제안을 거절했다. 티랩스는 지난해 기업 가치 100억원에 이어 올해 300억원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내년도 목표 기업 가치는 900억원이다.


"산업에 쓰이는 '진짜 연구' 갈망…10초 안구마취, 美 FDA승인 앞둬"

김건호 교수 (리센스메디컬 대표)

“교수 임용이 됐으니 저도 나름대로 논문 실적이 좋았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논문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공허함이 커졌습니다. 논문을 위한 연구 말고, 산업에서 쓰이는 ‘진짜 연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김건호 리센스메디컬 대표(UNIST 생명과학부 교수)는 안구 마취 시간을 기존 5~10분에서 10초로 단축시켰다. 세계 최초로 안구 내 주사요법(IVT)을 위한 세포 급속 정밀냉각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개발한 기술은 정확하게 영하 80도~영상 10도 중 원하는 온도로 냉각이 가능하다.

황반변성이나 당뇨 망막병증 환자는 망막이 얇아지면 실명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사기를 이용해 안구에 직접 치료제를 투입한다. 약물을 투여하기 전 안구를 마취하는 데 지금은 10분이 걸린다. 그러나 김 대표가 개발한 기술을 적용한 메탈팁을 안구에 갖다 대기만 하면 마취가 10초 만에 끝난다. 김 대표는 “‘훨씬 편하다’는 임상 환자들의 반응을 접하면서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직 제품 상용화 전이지만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리센스메디컬이 미국 안과의사 3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97%가 “제품을 구매하겠다”고 답했다. 현대기술투자 코오롱 라이트하우스컴바인 기술보증기금 등을 통해 30억원을 투자받았다.

김 대표가 개발한 안구 급속 마취 시제품은 내년 말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앞두고 있다. 그는 “승인 절차를 완료하는 대로 의료 수가가 높은 미국 의료시장에 곧바로 진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0억원 규모에 달하는 미국 눈 망막 치료제 시장도 눈여겨보고 있다. 그는 “망막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진료 시간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마취”라며 “마취 시간이 줄면 약도 더 빨리 소비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제약사를 대상으로 라이선스 아웃(기술 이전)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급속 냉각 기술을 피부과 치료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그는 “냉각 시술은 세포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자가 치유를 유도해 아토피 치료에 효과적”이라며 “냉각 기술을 다양한 치료법에 적용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석·박사급 맞춤형 인재 영입해…통증 없는 마이크로 바늘 상용화"

정형일 교수 (주빅 대표)

정형일 주빅 대표(연세대 생명공학부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마이크로 니들’을 직접 실용화겠다는 생각에 주빅을 설립했다.

마이크로 니들은 지름·높이가 각각 0.3㎜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바늘이다. 바늘 자체에 약물을 넣어 찌르면 사람의 신체 안으로 약물이 옮겨간다. 바늘 크기가 작기 때문에 통증을 거의 유발하지 않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다. 마이크로 니들이 빼곡하게 붙은 패치를 붙이는 방식으로 약물을 체내에 투여할 수 있다. 주삿바늘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이나 장기적으로 약물을 투여해야 하는 당뇨 환자 등이 예상 고객이다. 정 대표는 “개발한 기술을 기업체에 이전하기도 했지만 연구자로서 아쉬움이 남았다”며 “교수는 연구하고 교육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도 변화하는 것 같아 직접 사업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업 직후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교수와 기업 대표의 일을 동시에 하기가 어려웠다. 정 대표는 “학계에서는 ‘돈을 벌려고 연구를 게을리한다’는 말이 나오기 일쑤였고, 업계에서는 ‘돌아갈 곳이 있어 사업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창업하고 나니 연구비를 쓰는 데도 눈치가 보였다. 설립한 회사에 필요한 연구를 교수연구비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공격을 자주 받았다. 정 대표는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갖가지 각서를 써야 했다”고 말했다.

교수 창업의 장점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고급 인력을 구하기가 쉬웠다. 정 대표는 “박사급 인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일반 중소기업에 비해 교수가 창업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은 연구실에서 직접 교육한 맞춤형 인재를 공급받을 수 있는 강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교수 창업의 핵심이 되는 기술은 대부분 해당 교수의 전문 연구 분야다.

주빅에는 연구개발(R&D) 인력으로 박사 1명, 박사과정생 3명, 석사 1명이 있다. 주빅에서 필요한 마이크로 니들 관련 기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맞춤형 인력이다.

주빅은 기술보증기금과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 등 벤처캐피털에서 34억원을 투자받았다.

김기만/심성미/이우상 기자 i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