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진 지식사회부 기자 justjin@hankyung.com
[ 정의진 기자 ]
직장인 성모씨(24·여)는 지난 11일 아침 출근길에 봉변을 당했다. 서울 광화문역 6번 출구를 나오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내걸린 깃발이 바람에 날려 지나가던 성씨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그는 “추워서 그런지 마치 칼날에 찔린 듯 아팠다”고 전했다. 광화문역 6번 출구에는 한 달 전부터 깃발 30여 개가 내걸려 방치돼 있다. 출구 난간에 케이블 타이로 엉성하게 묶인 이들 깃발은 한 보수 단체가 설치한 것이다.
주변을 지나는 시민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직장인 박모씨는 “6번 출구 주변은 인도 폭이 좁아 오갈 때마다 깃발이 머리에 부딪히고 눈에 찔리기도 한다”며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광화문광장과 주한미국대사관이 바로 길 건너에 있는데 왜 이곳에 설치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경기 안양에서 박물관을 찾아왔다는 이정선 씨(62)도 “지하철 출입구 표시가 깃발에 가려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맸다”며 “특정 집단이 공공시설을 이렇게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것이냐”고 불만을 털어놨다.
촛불시위 이후 광화문에는 진보 단체와 보수 단체가 시위하면서 각종 불법 시설물을 경쟁적으로 설치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세월호 추모 텐트가 수년째 설치돼 있는 게 대표적이다.
지하철 출구에 깃발을 설치하는 행위도 엄연한 불법이다. 이번에도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은 단속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있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지하철 입구에 깃발을 설치할 수 없다”면서도 “(광화문역 깃발은) 단순 옥외광고물이 아니라 신고된 집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관리 주체는 경찰”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자체가 무작정 깃발을 철거했다간 자칫 집회 방해죄로 고발당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경찰 관계자는 “깃발 철거에 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지자체에 있다”고 했다. 깃발을 설치한 단체도 “내부적으로 깃발 설치에 대해 의견이 대립하는 상황이라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된 게 없다”며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단속 주체와 설치 주체가 손을 놓고 있는 지금도 깃발은 강풍에 펄럭이고 있고, 시민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