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누가 노랫말을 만드는가?

입력 2019-01-10 00:21
고학찬 < 예술의전당 사장 kevingo@sac.or.kr >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어린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때다 싶어 평소에 궁금하던 걸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봤다. “미안한데 학생들, 요즘 무슨 노래가 유행이에요?” 그들은 갑작스러운 노인의 물음에 처음엔 당황하더니 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몇몇 곡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래서 “혹시 노래를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가사도 보고 싶고요”라고 했는데, 버스가 와버려 아쉽게도 명랑한 학생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추천받은 곡과 가사를 검색해봤다. 노래를 들으며 우선 노랫말의 절반이 영어, 외래어라는 사실에 놀랐다. 필자가 젊은 시절 불렀던 노랫말과도 상이했는데 가령 “그대” 대신 “너”, “하셨나요?” 대신 “했니?” 같은 반말투가 대부분이었다. 가사 분량도 과거의 절반이나 될까 싶었다.

하긴 돌아보면 예전 가요에도 영어가 섞여 있었다. 작년에 작고한 가수 최희준의 노래 ‘우리 애인은 올드 미쓰’에도 “데이트에 좀 늦게 가면 하루 종일 말도 안 해. 왓 섈 아이 두”란 가사가 있었고, 나도 흥얼거리며 부른 기억이 난다. 세상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는데 노랫말이라고 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대중가요의 변화에서 특히 안타까운 것은 노래와 멜로디에 비해 가사가 홀대받는다는 것이다. 어느 가사에든 쓰는 이가 느끼는 당시의 아픔과 기쁨, 고민과 바람이 깊게 묻어 있다.

가요뿐 아니라 가곡은 더하다. 이은상, 박목월, 김소월 등 당대 최고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으니 멜로디보다 못할 리가 없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동요에 나오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구절도 본래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해방 이후 찾아온 분단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 그 안에서 찾는 희망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과거 우리 민족은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방황, 독립의 염원을 노래를 부르며 달래고 이겨내기도 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도 시대의 고민과 희망은 있으리라. 그런데 노랫말에서 그런 감성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필자가 감각이 무뎌진 탓이기를 바랄 뿐이다. 밥 딜런은 2016년 대중음악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에는 당대 미국의 아픔과 고민, 특히 젊은이들의 깊은 슬픔이 녹아 있다. 우리 젊은이들의 노래에도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풀어내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날 텅 빈 버스 정류장에서 앉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