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큰 불황은 중앙은행의 실기·무지가 초래"

입력 2019-01-09 18:17
밀턴 프리드먼, 안나 슈워츠 《대공황,1929~1933》


[ 백광엽 기자 ] “대공황에 관해 당신들이 옳았습니다. 그간 우리의 잘못에 유감을 표시하며,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가 Fed 이사였던 2002년 11월 시카고대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대공황, 1929~1933》의 공동저자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에게 바친 헌사다. Fed가 ‘통화 감축’이라는 부실대응으로 대공황 사태를 키웠다는 분석에 동조하며,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로부터 3년 뒤 Fed 의장이 된 버냉키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자 당시 다짐을 실천했다. 저자들의 분석에 기초해 ‘제로 금리’까지 동원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감행한 것이다.

초유의 정책에 갑론을박이 불붙었다. 버냉키 의장은 통화를 마치 공중에서 뿌려대는 듯 마구 살포한다며 ‘헬리콥터 벤’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하지만 위기가 진정됐고, 세계 경제는 정상궤도로 복귀했다.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라는 평가에 토를 다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현대경제학은 여전히 이 책이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논쟁 중”(버냉키)이라고 할 만큼 아이디어와 영감이 넘치는 저작이다.

수요부족 아닌 통화축소가 공황 원인

1963년 출간된 이 책은 대공황 심층 진단을 통해 ‘경제 분석 틀’의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왔다. 당시 제왕적 지위를 누리던 ‘케인스주의’를 골방으로 밀어내고 ‘통화주의’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1929~1933년 전 세계 산업국가들이 딱히 설명하기 힘든 동반 경기침체에 맞닥뜨렸다. 불과 4년여 만에 미국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장기추세선에서 30% 이상 이탈했다. 독일 영국 등 유럽 산업국의 경제도 곤두박질쳤다.

“대공황은 고장난 통화 메커니즘에서 비롯됐고, Fed의 긴축통화정책 탓에 심화됐다”는 게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결론이다. 저자들은 “통화량 긴축이 대공황을 촉발시켰다”는 가설을 세운 뒤, 광범위한 통계와 정황을 들어 꼼꼼하게 논증해 냈다. Fed가 최종대부자 역할을 하지 못해 통화공급 위축이 가속화됐고, 이것이 총수요와 고용을 위축시켰다고 진단했다. “디플레와 은행 도산의 고통을 단축시킬 능력이 있음을 Fed가 자각하고, 그 힘을 사용했다면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대공황, 1929~1933》은 출간 직후부터 큰 논쟁을 불렀다. “공황은 과소 소비와 유효수요 부족 때문에 발생하며, 재정 확대로 해소해야 한다”는 케인스경제학이 절대적 권위로 수용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Fed의 ‘서투른 통화정책’을 조목조목 제시하며 직격탄을 날렸다. “통화가 감소하는 데도 신용확장 국면으로 오판하는 등 Fed는 너무 무지했다.”

이 책은 실기(失機)하지 않는 선제적 통화정책이 작은 불황이 큰 불황으로 가는 것을 막는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사태가 시작되려는 상황에서 돌덩어리를 멈추게 하는 데는 큰 힘이 필요하지 않다. 이를 막지 않아 발생하는 산사태는 감당하기 힘든 큰 규모가 될 수 있다.”

'양적완화' 기초 된 현대경제학 교본

중앙은행의 리더십도 강조하고 있다. 대공황 당시 출범 20년이 채 안 됐던 연방준비은행은 경험도 통찰도 없었다. 사실상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했던 뉴욕연방은행의 벤저민 스트롱 총재가 대공황 발생 1년 전인 1928년 10월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리더십 공백이 나타났다. 혜안, 설득력, 용기까지 갖췄던 스트롱 총재는 영국 중앙은행의 몬태규 노먼, 프랑스은행의 에밀 모로, 독일제국은행의 히알마르 샤흐트 총재 등과 글로벌 금융시장을 주도한 거물이었다. 스트롱이 사라지자 아무도 뉴욕연방은행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트롱의 후임인 해리슨 총재는 신속한 팽창정책을 강력 지지했지만, 다른 총재들을 설득하지 못해 확장정책이 좌절되고 말았다. “국가적 차원의 책임에는 관심 없는 지역 은행들은 따로 움직였고 사회 전반에 패닉분위기가 확산됐다.”

《대공황, 1929~1933》은 ‘화폐적 현상은 부차적이고, 통화정책은 무력하다’며 재정과 총수요 관리정책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와 오랜 주도권 다툼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싸운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 Fed 의장이 가장 먼저 프리드먼과 슈워츠에게 승점을 안겼다. 볼커는 치솟은 실업률과 물가를 통화 조절로 진정시키며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입증했다. 2008년 11월부터 6년간 시행된 버냉키의 ‘양적완화’ 정책은 화룡점정 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화로 신자유주의를 비난하며 ‘왕좌 복귀’를 노렸던 케인지언들은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고 말았다는 평가다.

이 책의 주장은 학파를 떠나 현대경제학에서 대부분 수용되고 있다. △인플레는 통화정책으로 통제가능하다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의 상충관계는 없다 △정치인·의회에 휘둘리는 재정정책은 비효율적 요소가 많다 등의 명제가 대표적이다. “통화공급은 일정률로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에도 공감이 커지면서 각국 중앙은행의 ‘인플레이션 타기팅’(물가안정 목표제) 도입도 확산되고 있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