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현 "열등감 극복하려는 도전정신이 내 성공의 밑천"…상상력으로 위기 뒤집어 '톱 디벨로퍼' 올랐다

입력 2019-01-09 17:35
2019 위기를 기회로 - 창업 기업인의 꿈과 도전
(6) 문주현 MDM 회장

국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 키운 비결
잡초같은 근성 - 시골·검정고시 출신…실력으로 승부
역발상 전략 - 광교·삼송 불확실했던 사업 성공시켜
내 별명은 '독일병정' - 뚜벅뚜벅 앞만 보고 나간다


[ 이정선 기자 ]
2007년 4월 초. 깡마른 체구의 문주현 엠디엠(MDM) 회장이 부산 해운대구청장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 주상복합의 분양 승인이 지연되면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서다. 통상 1~2주일이면 도장이 찍히는 막바지 문턱을 두 달째 넘지 못하고 있었다. 구청은 높은 분양가를 문제 삼았다. 은행에서 빌린 땅값 이자는 그새 20억원까지 불어나 있었다. 종잣돈을 몽땅 털어 개발 사업에 뛰어든 문 회장이 빈털터리가 되느냐, 디벨로퍼로 자리잡느냐를 결정하는 운명의 시기였다.

“구청장이 문 열고 나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는데, 내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라고 합디다. 문전박대였죠. 그래도 줄기차게 쫓아갔습니다. 내가 뚝심 하나는 타고났어요.”

몇 차례 더 찾아가 읍소한 끝에 겨우 면담 기회를 얻어냈다. 문 회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열변으로 센텀시티 부지의 미래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왜 고급 주상복합을 지어야 하는지를 쉴 새 없이 토해냈다. 물꼬를 튼 문 회장은 구청장과 실무부서를 오가며 끈질긴 설득에 나섰다. 분양가를 더 깎으라는 구청 요구에 “땅의 가치에 맞지 않는 상품이 들어서면 도시가 망가진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개발이익이 탐나서가 아니라 첫발을 내딛는 디벨로퍼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결국 석 달 만에 분양 승인이 떨어졌다. 주변 시세의 두 배가량인 3.3㎡당 1600만원의 조건이었다.

MDM은 뛰어난 입지, 최고급 시설, 주방가구 등을 내세워 고급 주택에 목말랐던 부산의 VIP들을 공략했다. 당시 시공사였던 대우건설 현장소장은 “실내를 천연대리석으로 도배하느라 중국의 야산 하나를 다 깎았다”고 했다. 공을 들인 상품에 청약자들은 열광했다. 센텀시티가 고급 주거단지로 인식되면서 타사의 후속 분양도 속속 성공을 거뒀다. 문주현의 이름을 디벨로퍼업계에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문 회장이 부동산 개발에 눈을 뜬 건 훨씬 오래전이다. ‘조이너스’ ‘꼼빠니아’ 등 여성 의류 브랜드로 유명했던 나산그룹이 부동산 개발에 뛰어든 것이 그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가 1987년 늦은 나이(31세)에 나산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회사 임원이 부르더니 느닷없이 오피스텔 시장을 조사하라고 시켰습니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를 때였어요. 서울 마포 오피스텔부터 강남역 지하상가까지 발로 뛰며 배웠습니다. 그런데 너무 재밌는 겁니다. 원래 내가 변화를 좋아하는데 프로젝트마다 상품, 입지 여건이 다르니 내 성격과 딱 맞았습니다. 천직을 만난 겁니다.”

나산그룹에서 그는 ‘독일병정’으로 불렸다. 업무 추진력이 강하다고 붙은 별명이다. 그 덕에 일곱 번의 특진을 거듭하며 입사 7년 만인 38세에 ‘별(임원)’을 달았다. 나산의 최연소 임원이었다.

“늦깎이 사회 초년생을 받아준 회사에 대한 고마움이 컸습니다. 하나를 지시하면 셋을 해내겠다는 각오로 주말에도 나와 일했습니다. 직장인이 성공하는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금방 소문납니다.”

잘나가던 문 회장에게 외환위기 파고가 덮쳤다. 많은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할 무렵 졸지에 그도 실업자로 전락했다. 몇몇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그는 고민 끝에 창업을 결심했다.

“모두 기업을 접는 판국에 왜 창업하느냐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난 항상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준비해 봄에 씨를 뿌려야 가을에 걷을 수 있잖아요? 그동안 인정받았으니 자신도 있었고. 세상에 나를 테스트해보자는 오기도 발동했습니다.”

문 회장은 자본금 5000만원을 모아 세 명의 직원과 함께 그해 4월 서울 서초동의 한 칸(33㎡)짜리 원룸에서 MDM을 창업했다. 자신의 성(姓)을 건 이름(MOON Development & Marketing)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디벨로퍼를 꿈꿨다. 하지만 밑천이 없었다. 그가 가진 건 아이디어와 열정, 도전정신뿐이었다. 일단 분양대행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였다. 미분양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건설사들이 MDM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 분양대행에는 관심이 없었다. 상품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켰다. 분양대행업이지만 건설사를 빌려 사실상 디벨로퍼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시장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는 그가 구상하는 상품은 경쟁력이 높았다.

“상품이 좋으면 마케팅은 끝난 겁니다. 그런 면에서 디벨로퍼는 ‘전략가’라고 생각합니다. 전략에 따라 전쟁에서 승패가 갈리잖아요? 다만 그땐 분양대행사였으니 현대건설, 포스코건설의 갑옷을 입고 싸울 뿐이었습니다.” 문 회장은 상품 기획력을 무기로 수수료도 다른 대행사보다 비싸게 받아냈다. 이때부터 MDM은 4만여 가구를 팔아 치우는 성과를 올렸다. 분양가로 환산하면 16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문 회장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 분양대행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음해성 루머까지 나돌곤 했다.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그의 말마따나 ‘정나미가 떨어진’ 시기였다. 회사가 흔들릴 기미가 보이자 직원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함께 창업에 나선 동료들이었다. “직원들이 불쑥 사과 박스를 들고 들어와서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하더군요. 어려운 일을 겪으니 사람을 알게 됩디다.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를 입은 때입니다.”

그 후로 문 회장은 3년간 사업을 접다시피 했다. 상처를 보듬기 위해 그는 걸었다. 탄천을 수도 없이 오갔다. 청계산, 광교산을 닥치는 대로 올랐다. 서서히 마음을 추스르던 문 회장은 비로소 꿈꾸던 개발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직원들이 떠난 빈자리는 더 훌륭한 인재로 채워졌다. 그는 새삼 ‘신의 섭리’를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결실을 맺은 첫 사업이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이다. 이 사업을 합해 그동안 24건의 개발 사업을 수행한 문 회장은 단 한 건의 프로젝트도 실패한 적이 없다. 입버릇처럼 “운이 좋아서”라고 하지만 주변 평가는 다르다. 위기 상황에서 과감하게 베팅하는 역발상의 승부수가 문 회장의 ‘필살기’라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도 “두둑한 배짱은 타고난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실제 경기 수원 ‘광교 레이크시티’, 고양 ‘삼송 e편한세상 시티’ 등은 사업성이 불확실해 임직원들은 물론 경쟁사도 꺼리던 프로젝트였다.

문 회장의 잡초 같은 근성은 타고난 면도 있지만 길러지기도 했다. 전남 장흥의 갯마을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겨울에 부르튼 손으로 김·미역을 뜯고 뒷산에 올라 땔감을 구해야 했다. 머슴 같은 생활을 도망쳐 들어간 직업훈련원 시절엔 하루 12시간씩 일하다 쇳물이 튀어 온몸에 쇳독이 오르기도 했다. 이러다 평생 공장을 못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검정고시를 치렀다. 그리고 27세 때 경희대 회계학과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난 열등감이 많습니다. 촌놈에 고등학교도 못 나온 놈입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니 ‘빽’도 없고 내세울 게 없습니다. 오직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럽기는커녕 소중하고 값진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과거를 숨기는 사람은 잘 만나지 않습니다.”

글=이정선 기자 / 사진=김영우 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