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치킨집 대신 은행을 창업할 수 있는 나라

입력 2019-01-07 11:43
'연못 안 메기' 역할한 英 인터넷전문은행
한국도 청년들이 은행 창업할 수 있다면

정인설 런던 특파원


[ 정인설 기자 ] 영국에서 은행 계좌를 개설하려면 준비할 서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분증과 급여증명서뿐 아니라 주소지 증빙서류 등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건 인내심이다. 과거엔 넉넉히 한 달은 기다려야 했다. 담당 은행원과 상담 약속을 하는 데 1주일, 계좌번호 발급에 1주일이 걸렸다. 이후 1주일이 지나면 현금카드나 신용카드를 받고 다시 1주일 뒤 카드 비밀번호 같은 개인식별번호(PIN)가 제공됐다.

오랫동안 영국 거대 은행들은 계좌 개설을 서둘러 달라는 소비자의 요구가 아무리 빗발쳐도 꿈쩍하지 않았다. 계좌가 있으면 개인이 수표를 발행할 수 있어 개인 신용도를 깐깐히 심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댈 뿐이었다. 거래처든 뭐든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는 영국인의 습성은 이런 은행 영업 관행을 고착화한 한 요인이었다.

그랬던 영국 은행들이 변하고 있다. 2010년 생긴 메트로뱅크라는 은행이 메기 역할을 했다. 토요일뿐 아니라 일요일에도 정상 영업을 하는 곳이다. 평일 영업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영업 시간이 길다 보니 업무 처리가 상대적으로 신속했다. 약속 없이 바로 계좌 개설 상담을 하고 신원이 확실하면 즉시 계좌를 열어주고 카드까지 발급했다. 그랬더니 메트로뱅크 점포가 있는 지역의 다른 은행 지점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당일 바로 상담하고 계좌 개설 기간도 절반으로 줄였다. 똑같은 바클레이즈은행 점포라도 메트로뱅크 주변의 지점과 그렇지 않은 지점의 업무 처리 속도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메트로뱅크의 뒤를 이어 영국 은행을 바꾼 주역은 인터넷전문은행이다. 2015년 이후 생긴 몬조와 레볼루트, 스탈링뱅크 등이 중심에 있다. 영국 정부가 특정 분야에서 규제를 일시적으로 풀어주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도입한 때다. 인터넷전문은행들은 대면 심사 없이 온라인으로 신분 조회를 한 뒤 바로 계좌번호를 발급했다. 실물 카드도 2~3일이면 배송을 끝냈다. 체크카드를 써도 하루 뒤에나 결제 내역이 확인되는 기존 은행들과 달리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을 통해 결제 뒤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영국 인터넷전문은행들은 외환거래로 영역을 확대했다. 해외에서 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붙는 2% 안팎의 해외 결제 수수료를 없앴다. 해외에서 200유로까지 수수료 없이 현금을 인출할 수 있게 했다. 주요 24개국 통화의 환전 수수료도 없앴다. 가상통화 분야에도 진출해 가상통화 거래 수수료를 4분의 1 수준으로 줄였다. 직장이 변변치 않은 젊은 층과 영국에 갓 입국한 외국인들이 열광했다. 유럽 국가와 중동에서도 가입 행렬이 이어졌다. 설립 3년 만에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인터넷전문은행들은 자본력과 금융주력자 요건을 갖춘 이들이 아니라 30대 영국 청년과 퇴직한 은행원들이 창업했다. 그 뒤 다른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처럼 외부 투자를 받아 거대 은행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런 혁신 덕에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앞두고서 “금융에선 독일이나 프랑스가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자신만만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전문은행 추가 설립이 추진된다고 한다.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될 것이라는 정부 발표도 있다. 하지만 영국처럼 보통의 젊은이나 전직 은행원이 새로운 은행을 창업할 수 있을까. 핀테크란 용어조차 무색해진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은 더 희박해지고 있는 듯하다.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