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슬픈 중년들
노화로 여기는 갱년기 현상이 우울증 될 수도
자기 감정 돌아보고 느끼고 표현하기를
김진세 <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 >
요즘 부쩍 잠이 많아진 이 부장은 걱정이 됐다. 아무리 많이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다. 워낙 정열적으로 일해서, 회사에서는 장군이라고 불리던 그였지만 쉰이 넘으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보통 두세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해도 그럴듯한 성과를 냈었다.
그런데 요즘은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 성과도 엉망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많이 위축됐나 보다. 주변 사람 눈치를 많이 보지만, 무엇보다 속상한 것은 집에서 벌어진다. 아내의 작은 핀잔에도 핏대가 솟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서러움마저 들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다가 큰 소리로 우는 그에게 “누가 보면 갱년기라도 온 줄 알겠어요”라고 코웃음을 치는 아내에게 그는 항변조차 못했다.
이 부장의 아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남자도 갱년기를 앓는다. 여성호르몬 감소가 여성 갱년기의 원인이 되듯, 남성 또한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저하로 갱년기가 온다. 단지 폐경 또는 완경과 같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변화가 없기에, 중년 남성에게는 갱년기가 없다고 착각할 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30대 이후 매년 1%씩 감소한다. 중년이 되면 그 속도가 더 빨라진다. 50세가 넘으면 대부분 남성이 그 변화를 실감한다. 여성의 갱년기는 안면홍조와 열감이 흔한 증상이지만, 남성 갱년기의 가장 흔한 증상은 ‘성욕과 기력 저하’다. 예전과 비교해 성적 활동이 거의 없고 훨씬 쉽게 피곤해진다.
그렇다면 남성에게도 여성처럼 갱년기의 한 증상으로 우울증이 올 수 있을까. 당연하다. 남성 역시 이 부장처럼 기력 저하, 집중력 저하, 감정의 동요와 같은 경증 우울증부터 일상생활을 유지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심각한 우울증까지 앓을 수 있다. 그런데 남성은 우울증을 진단하기 어렵다. 병원을 잘 찾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아주 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힘이 좀 없고 회사 업무가 버겁다고 느껴질 뿐이니 일반적인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감정이 무딘 것도 병원을 찾지 않는 원인이다. 여성은 감정 변화에 쉽게 반응한다. 우울증이 발생하면 건강의 위험신호로 해석하기 쉽다. 반대로 감정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남성은 아주 심각한 상태가 될 때까지 방치하기 쉽다. 남성호르몬 변화 때문이지만, 우리가 받은 양육과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감정을 부정적인 것으로 교육받은 것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아마 자라면서 학교나 집에서 “남자가 이 정도로 울어?” 또는 “점잖지 못하게, 그렇게 크게 웃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 중년 남성은 거의 없으리라.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인 면으로 학습했으니, 자신의 슬픔을 느끼고 표현하기 힘들다.
그래서 중년 남성의 우울증은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병원에 와서는 단순히 기력이 없고 집중이 안 돼서 왔다고, 슬퍼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상담을 하고 검사를 받으면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소위 ‘가면 우울증(masked depression)’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중년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생물학적으로는 남성호르몬 저하를 막는 것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운동(특히 근력운동)과 함께, 절주와 금연이 도움이 된다. 많이 우울하다고 느끼지 못해도, 심각하게 기력이 떨어지거나 회사 업무 능력이 급감한다면 우울증을 고려해봐야 한다. 물론 치료받으면 정상적으로 호전된다.
무엇보다 감정 표현이 중요하다. 중년이라도 늦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느껴보고 표현해봐야 한다. 감동적인 영화나 공연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감정을 억압하게 해서는 안 된다.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어야 한다. 건강한 정신을 원한다면 결코 감정에 가면을 씌워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