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경제·사회 틀 바꾸겠다"
'경제는 생물', 정해진 종착역 없어
막다른 골목길에선 유턴이 정답"
오형규 논설위원
[ 오형규 기자 ]
‘정치는 생물(生物)이다.’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본 노정객 DJ의 말이다. 하지만 진짜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건 정치보다 경제다. 정치는 정권 교체로 확 바뀌지만, 경제는 사람을 바꿔도 관성이 작용해 충격과 변화에 어떤 화학적 반응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렵다. 대내외 모든 변수가 시시각각 영향을 미치고, 경제주체들은 수시로 행동을 바꿔 또 변화한다.
자연법칙과 달리 예외 없는 경제법칙은 없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면 개인과 기업은 항시 대책을 궁리한다. 최저임금 폭주에 대해 시장은 당장 무인주문기, 셀프주유소, 주휴수당 없는 15시간 미만 ‘메뚜기 알바’로 반응한다. 이런 속성을 모르면 시장의 처절한 ‘보복’이 기다린다.
새해에도 서울 거리 곳곳의 임대 현수막은 늘기만 한다. 해안 산업벨트가 녹슬어 가고, 소상공인 비명 소리는 더 커지고, 알바 자리조차 하늘의 별따기다. 한 대부업체 사장은 “고객들이 명목소득은 물론 실질소득까지 줄어 신규 대출이 불가능하며 이미 영남, 충청, 강원 지역은 초토화됐다”고 귀띔한다. 경제의 기초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접한 많은 이가 “올해도 경제·민생은 기대할 게 없다”고 한탄한다. 문 대통령은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했다. 그 길은 물론 “경제·사회의 틀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강조하고, ‘소득주도 성장(소주성)’은 말하지 않았다 해서 정책기조 변화를 기대했다면 유치한 발상이다. ‘소주성’이란 정권 브랜드의 이미지가 나빠져 잠시 라벨을 가렸을 뿐이다.
지난 20개월간 경제·일자리 참사를 보고도 “가던 길을 가겠다”는 걸 보면 “현 정권이 자기 당위성 함정에 빠졌다”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진단이 타당해 보인다. 그래야 “긍정효과가 90%”,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경제 실패 프레임이 강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엉뚱한 발언들이 겨우 이해된다. “대통령이란 거짓된 보고를 가장 많이 받는 자리”라는 YS정부 전직 장관의 소회가 떠오른다.
대통령이 경제를 팩트대로 보지 못하는 데는 오래전 공부를 멈춘 주변 참모들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들의 경제관은 세상이 ‘제로섬(zero-sum)’이며, 누군가의 성공은 다른 누군가의 실패로 간주한다. 이는 약자의 눈물을 닦기 위해 성공한 소수를 징벌해야 하고, 노동 존중과 자본규제 논리로 자연스레 귀착된다. 이런 경제관으로 경제활력을 말하니 아이러니다.
세계는 한참 전에 성장의 원천을 토지·자본·노동 등 전통 생산요소가 아닌 지식·기술에서 찾는 경제관의 대변혁이 일어났다. 똑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도 누가 어떻게 내놓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폴 로머가 1990년 새로운 생산 3요소로 ‘아이디어, 사람, 재료’를 꼽은 내생적 성장론을 제시해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배경이다.
경쟁국들은 4차(융·복합)·5차(바이오) 산업혁명을 구상한다. 하지만 국내에선 해묵은 노동가치설과 1980년대 독점자본론에 갇힌 정책들이 쏟아진다. 진화하는 생물과도 같은 경제를 유연성도, 적응력도 없는 경직된 괴물로 만들고 있다.
2017년 여당 대선후보 경선 때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문재인 후보는 미래 비전이 없다”고 지적했다. 10년, 20년은커녕 당장 뒷감당 못할 공약들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이 정부가 수시로 ‘국민 눈높이’를 말하지만 국민은 ‘내 형편(현재)’보다 ‘자식 장래(미래)’를 더 걱정한 지 오래다.
‘함께 잘사는 복지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자유가 보장돼야만 가능하다. 스웨덴의 복지가 부러우면 소득 절반을 세금으로 떼고, 발렌베리 같은 재벌을 키운 것도 함께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의 ‘가선 안 될 길’이 기다릴 뿐이다. ‘가보지 않은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길이 막다른 골목이라면 유턴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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