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의 논점과 관점] '3기 자족 신도시'라는 환상

입력 2019-01-01 17:22
김태철 논설위원


[ 김태철 기자 ] 프랑스 파리 도심에서 약 8㎞ 떨어진 센강변의 ‘라데팡스’. 서울 마곡지구(336만㎡)의 약 1.7배인 이곳(564만㎡)은 ‘신도시 개발’의 교본(敎本)으로 꼽힌다. 주거·업무·상업 등 도시 기능을 두루 갖춘 데다 현대식 빌딩군(群)이 곳곳에 자리잡은 ‘신(新)개선문(La Grande Arche)’ 등 각종 예술 건축물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라데팡스에는 토탈 등 1500여 개 다국적 기업에서 약 18만 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도 연 800여만 명에 이른다.

라데팡스의 성공 요인은 치밀하고 일관된 도시계획으로 자기만의 색깔을 냈다는 것이다. 1958년 개발 시작 당시 콘셉트는 파리의 역사 유물과 연계한 다기능 복합도시였다. 청사진을 짜는 데만 6년 걸렸고, 개발에는 약 40년이 소요됐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청사진을 유지했다.

'베드타운' 전철 밟는 3기 신도시

미국 뉴욕 맨해튼의 배터리파크 시티, 독일 베를린의 포츠다머 플라츠 등 ‘성공한 신도시’의 비결도 라데팡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긴 안목으로 계획을 세우고, 20~30년에 걸쳐 차근차근 자족 기능을 갖춰 나갔다.

한국의 신도시들은 어떤가. 거의 모든 신도시들이 ‘자족 도시’를 표방했지만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자족 기능이라고 해봐야 벤처단지나 아파트형 공장을 넣는 수준이다. “집값을 잡아야 한다”는 여론에 떠밀려 5~6년 만에 뚝딱 신도시를 건설하다 보니 자족 기능은커녕 전철 등 광역교통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게 현실이다.

정부가 지난달 말 발표한 하남 교산, 남양주 왕숙 등 네 곳의 3기 신도시도 개발 내용을 들여다보면 ‘자족 신도시’라는 정부 희망과는 달리 베드타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발 기간이 짧은 데다 기존 신도시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개발 구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뚜렷한 도시 비전도, 경쟁력 강화 전략도 없는 상황에서 자족 신도시 건설을 외치는 것은 되레 도시 활성화를 저해할 뿐이다. 자족 기능을 강화한답시고 기업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곳에 벤처단지와 업무 시설을 집중적으로 넣으면 빈 땅과 공실(空室)이 즐비한 ‘유령도시’로 전락할 뿐이다.

"용적률 높여 인프라 더 투자해야"

‘개별 입지’에 적합한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신도시가 자족 기능을 갖추려면 인구가 50만 명을 넘거나, (라데팡스처럼) ‘기능의 역할 분담’이 가능하도록 기존 도시와 아주 가까워야 한다”는 게 도시계획학의 일반이론이다. 3기 신도시들은 계획 인구 규모도, 기존 도시와의 근접성도 이런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 “‘일부 자족 기능을 갖춘 주거 중심지’로 개발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러려면 3기 신도시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내걸고 있는 벤처단지 조성, 첨단산업 기업 유치 등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신도시 조성 원가를 줄여 교육·문화·의료 등 기반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 벤처용지 땅값을 주변보다 30~40% 낮춰 기업들이 제 발로 찾아오게 하는 방법도 필요하다.

신도시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용적률(180~200%)을 20%포인트 이상 높이면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 그 정도 용적률도 서울과 수도권 주요 도시들과 비교하면 충분히 친환경적이다. 여기에다 신도시 입주 시기에 맞춰 자율형사립고와 특목고 등을 대거 유치한다면 주거 선호도도 높아질 게 분명하다. 정부가 3기 신도시를 베드타운이 아니라 지역 거점도시로라도 키우려면 현실성이 떨어지는 ‘자족도시 건설’이라는 환상을 깨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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