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세계의 공영방송

입력 2018-12-07 18:02
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영국 BBC는 세계 최초의 공영방송사다. 1927년에 출범했으니 역사가 1세기에 가깝다. BBC 뉴스는 편견 없고 공정하기로 유명하다. 초창기부터 공정성과 형평성, 정확성으로 국민 신뢰를 얻었다. 1982년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벌였을 때 자국 군대를 ‘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으로 불렀을 정도다. 이런 정신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B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확인된다.

BBC 수익은 수신료와 프로그램 판매에서 나온다. 상업광고를 하지 않고 프로그램 사이에 공익광고와 예고방송을 내보낸다. 일본 최대 방송인 NHK도 공영방송이어서 광고 없이 수신료로 운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버지처럼 아직도 NHK 수금원들이 집을 찾아다니며 밀린 수신료를 독촉하기도 한다.

NHK는 ‘재난방송의 교과서’로 불린다. 기상청과 핫라인을 갖추고 지진·쓰나미 경보와 동시에 속보 자막을 내보낸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 때 지진 감지 2초 만에 긴급속보 자막을 띄우고 1분20초 만에 특보방송을 시작했다. 북한 핵 소식을 한국보다 먼저 보도하는 것도 NHK다.

미국 PBC 역시 광고 없는 공영방송이다. 성격은 한국의 EBS와 비슷하다. 미국 역사와 사회, 인문, 과학, 예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주로 방영한다. 프로그램 수준이 높은 데다 어디서든 무료로 볼 수 있어 영어교재로도 인기다. 호주 공영방송 ABC는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지만 국민 신뢰도는 80%를 웃돈다. 의회가 ABC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어 정부가 프로그램에 관여하기 어렵다.

국내 최대 방송사인 KBS는 한때 국영이었다가 1973년 공영방송으로 독립했다. 광고 없이 수신료로 운영하는 BBC와 NHK를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1980년대 언론 통폐합 이후 KBS2와 EBS의 광고 때문에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이른바 ‘땡전뉴스’에 격분한 국민들이 시청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논란이 이어졌고 정파에 따라 경영진이 교체되는 수난도 겪었다.

최근에는 EBS 자회사인 EBS미디어의 ‘북한 김정은 미화’ 사건으로 대표이사가 사퇴한 데 이어 1주일 만에 KBS 저녁 프로그램에서 ‘김정은 찬양 방송’을 여과 없이 내보내 논란을 일으켰다. 굳이 외국 사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치적 균형과 공공·공정·객관성이 무너지면 공영방송의 정체성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