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경제 버팀목' 환곡제도 붕괴…민생 파탄나자 왕조에 저항 확산

입력 2018-12-07 17:04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0) 민란의 시대

농업 생산 줄어 상환 못하고
양곡 저장물량 절반 이하로 감소
그마저 장부상 허수 많아
수령·향리들은 훔치고 유용

정부 재정악화로 보충 엄두 못내
곡식 못 나눠주고 수탈 몰두
통합능력 상실한 왕조에 반발
'생활고 민란' 들불처럼 확산



생활수준의 악화

점증하는 위기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수는 1814년 790만 명을 정점으로 1861년까지 674만 명으로 감소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 같은 공식 인구수의 추이는 실제 인구수 감소를 대변했다. 전국적으로 분포한 181개 양반가 족보에서 가족 구성을 복원한 연구에 의하면, 가족원 수는 19세기 초의 3.75명에서 1870년대의 3.25명으로 감소했다.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은 높아진 사망률이었다. 영양 상태가 악화돼 사람들은 질병과 추위의 위협에 더 많이 노출됐다. 농업 생산성의 하락을 반영해 농촌 일고(日雇)의 실질임금은 19세기에 걸쳐 근 3분의 1 수준으로 하락했다. 농촌사회의 안정 기조는 현저하게 허물어졌다. 사람들은 약간의 재해나 흉작에도 이리저리 대량으로 유동했다. 19세기 농가가 어느 면(面)에서 정착한 기간은 18세기에 비해 절반이나 짧았다.

국가적 재분배의 해체

악화일로의 추세이지만 1830년대까지 농촌사회의 안정을 떠받친 것은 환곡(還穀)을 축으로 한 국가적 재분배경제였다. 군왕이 백성의 살림살이를 보살핀다는 성리학적 왕정의 이념에 입각한 환곡의 운영은 18세기 농촌경제를 안정시킨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그 환곡제가 19세기에 들어와 해체됐다. 18세기 말 전국 각 고을에 저장된 환곡의 총량은 1000만 석에 달했다. 그것이 1860년대까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그것도 장부상의 허수인 경우가 많았다.

환곡이 줄어든 것은 농업 생산이 감소해 환곡을 상환하지 못한 농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군현 수령과 향리의 기강이 해이해져 환곡을 훔쳐 먹거나 상업자금으로 유용하다가 실패한 것도 한편의 원인이었다. 축이 난 환곡을 이전처럼 쉽게 보충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재정수지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매년 말에 중앙정부의 100여 기관이 재정자금으로 보유하는 각종 현물을 동전으로 환산한 총액은 1800년대까지만 해도 500만∼600만 냥에 달했다. 그러던 것이 1870년대가 되면 100만 냥 이하로 떨어졌다. 19세기 조선왕조의 재정은 적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취체제의 문란

조선왕조가 수습하기 힘든 위기에 빠졌음을 알리는 징후는 왕조의 지배체제에 대한 농민의 물리적 저항에서 뚜렷하게 관찰됐다. 가장 심각한 저항의 대상은 환곡제였다. 18세기 농촌사회의 안정을 지탱한 환곡제가 이제는 저항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중앙정부는 재정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환곡의 이자 수입을 중앙재정으로 이속시켰다. 군현의 관리는 농가에 환곡을 나눠 주지도 않은 채 이자의 수납만을 강요했다. 군현에 따라서는 그 이자를 토지세에 얹혀 수취했다. 이에 따라 토지세 수취도 문란해졌다.

조선왕조는 16세 이상의 남정에게 신역을 부과하는 개별 인신에 대한 지배체제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1750년 중앙과 지방의 군영에 배속된 군정(軍丁)의 총수는 50만 정도였는데, 18세기 말까지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들은 연간 1필의 군포를 소속 군영에 상납했다. 군정으로 선발된 사람은 주로 하층의 상민(常民) 신분이었다.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양반, 향리, 역리, 노비 등은 군포 부담에서 제외됐다.

군정을 선발하는 과정은 신분 간 내지 계층 간 가장 심각한 갈등의 소지를 이뤘다. 힘없는 상민 신분의 농민은 16세 이하의 어린아이도 군포를 부담했는데, 이를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 했다. 백골징포(白骨徵布)라 해서 사망한 자에게까지 군포가 부과되기도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농가가 도산하면 족징(族徵)과 인징(隣徵)이라 해서 그 친족과 이웃에게 부담이 전가됐다.

애절양

1788년 경상도 영천군의 경우 호의 총수는 3283호인데 양반 등 각종 면역호를 제외한 상민 신분의 호는 500여 호에 불과했다. 그런데 군정의 총수는 2783명이나 됐다. 상민 호에 중첩 부과된 군포의 부담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전라도 강진현에서 유배 중인 정약용은 군포 수취에 따른 갖가지 폐단을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더없이 생생하게 기록했다. 1803년 그가 지은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는 어느 상민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정으로 등록되자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랐는데, 그 아내가 그 생식기를 들고 관가에 가서 울며 하소연했으나 거절당했다는 내용이다. 하늘을 향한 여인의 서러운 울음이 정약용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제시된 자료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읽는 이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드는 그 시의 전반부다.


민란의 물결

드디어 농민들은 통합의 능력을 상실한 가운데 수탈에만 몰두하는 왕조의 지배체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840년 경상도 경주부의 백성이 한성에 올라와 대궐 앞에서 환곡제의 폐단에 대해 소청을 제기했다. 소수에 의한 합법적 청원의 형태로 시작된 농민 저항은 점차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형태로 바뀌어 갔다. 이윽고 1862년에 이르러선 남부지방 70여 군현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민란은 실세하거나 몰락한 양반 신분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에 호응해 민란에 참여한 중심세력은 가난한 소농들이었다. 대개의 민란은 지방 관아에 난입, 수령을 핍박해 인부(印符)를 탈취하고 고을 밖으로 축출한 다음, 민원의 대상인 향리와 토호를 살해하거나 그들의 집을 파괴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그들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의 회유로 해산했다. 일반적으로 농민들은 수령과 토호·향리의 개인적 탐악 때문에 민란이 야기됐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1862년 남부지방을 휩쓸었던 민란의 물결은 이후에도 잦아들지 않았다. 1876년 개항 이후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크고 작은 민란은 도합 100회에 달했다. 1880년대의 조선왕조는 수백 년 된 낡은 지배체제가 빚어내는 온갖 병통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다. 정치와 사회의 기강이 해체된 가운데 사회적 의적을 자처하는 명화적(明火賊)과 활빈당(活貧黨)이 기승을 부렸다. 전국 도처에 이들이 출몰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이들은 대개 30∼40명씩 무리를 지어 양반 토호와 유세 향리가를 약탈했다. 양반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고선 해골을 찾아가라고 겁박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지방 관아를 습격하거나 한성으로 올라가는 조세와 진상을 가로채기도 했다. 도적의 무리가 발호하자 장시와 포구를 오가는 상인의 행렬이 두절됐다.

농촌사회의 분열

갈등과 분열은 농촌사회 내부에까지 파고들었다. 경제적 곤궁은 농촌 주민을 갈등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1870년대 전라도 영광군이 접수한 소송은 연간 3000건에 가까웠다. 영광군의 호수가 1만2600호였으니, 연간 네 집 가운데 한 집이 송사에 휘말린 셈이었다. 갈등은 묘지를 둘러싸고 가장 심하게 벌어졌다. 그로 인해 친족과 친족이 다퉜으며, 같은 친족이라도 종가와 지손이 반목했다. 1810년 전라도 영암군의 문씨 일족은 100두락의 논을 공동 소유했다. 친족의 공동체적 결속을 뒷받침한 그 토지는 1895년까지 33두락으로 감소했다. 점증하는 갈등으로 유서 깊은 동계(洞契)가 허물어졌다. 수리, 영림, 교육을 둘러싼 자치질서도 정지했다. 보가 허물어졌는데도 오랫동안 방치됐다. 동계가 해체되자 노동의 규율이 무너졌다. 머슴은 주인의 지시를 무시했으며, 동패와 어울려 술과 노름으로 방종했다.

극한의 혼돈 속에서 이 세상을 구원할 복음은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로 전해졌다. 어디선가 진인이나 큰 장수가 홀연히 등장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남방진인설(南方眞人說) 또는 해도기병설(海島起兵說)이 널리 유포됐다. 흥부는 천하에 둘도 없는 궁상이었다. 그 흥부를 구한 것은 가족의 근로도, 친족의 지원도, 이웃의 협동도, 관가의 보조도 아니었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였다. 그 대박에서 무한한 쌀과 비단과 돈이 터졌다. 민란의 시대를 총괄하는 동학농민봉기는 이런 정신세계의 소빈농을 주력으로 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